김주석 지명 연구 - 물목섬의 각시바위
땅이름 연구
물목섬의 각시바위
김 주 석
1. 들머리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난여름, 이름 모를 들꽃이 만발한 사이로 이름 모를 나비가 춤추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다투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노라.” 고 말하는 중에, ‘이름 모른다’는 것쯤은 전혀 부끄럽게 여길 줄 모르는 좋지 못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름 모를 꽃과 나비’나 ‘이름 모를 새들’은 더러 있을 수도 있지만 이름 없는 산이나 골짜기는 드문 편인 반면, 어느 곳의 땅이름도 허투루 붙여진 데라곤 없는 법이다.
전라남도 여수의 용성단지와 그 주변에는 오늘날 첨단의 장치산업인 석유화학공장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는데, 이들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순박하던 농부와 어부들이 붙이고 불러온 땅이름과 지형은 어떠했을까?
산업화 과정의 일환으로, 머지 않아 이 고장 토박이들은 차츰 떠날 것인 바, 철새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하다 못해 깃털이라도 남을 테지만, 토박이가 떠난 자리엔 떨어져 뒹굴 깃털조차 없으니, 과연 무엇이 남을까? 정 붙이고 살던 그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지형도 변하고 인정도 변하면서 이 고장에 서려있던 전설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인져......
이에, 이곳 토박이들이 대를 이으며 입에서 입으로 구전해 온 진솔한 얘기와 참고 문헌을 뒤적여, 우리 나라 최초인 MDI 공장 터의 옛 지형과 거기 붙여졌던 땅이름을 비롯해 그 인근에 얽힌 성신앙의 전설 등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수집해 정리해 보았다. 인걸과 함께 구전이야 사라지게 마련일지라도 구전 속의 사실만은 보존해 둬야 할 우리의 값진 유산이니까. 그런 뜻에서 이 고장의 산과 강과 골짜기와 섬들을 여름 내 답사하며 보고들은 토박이의 얘기를 토대로 먼 훗날의 재조명을 위해 귀뚜라미 소리 그윽한 가을 저녁에 이 글을 쓴다.
전남 여수만큼 땅이름에다 젖빨이동물 이름을 갖다 붙인 고장도 드문 성싶은 바, 언뜻 살펴보더라도 호랭이바구[호랑이바위], 범바구산[虎岩山]과 그 호랑이의 밥인 토끼[兎島], 여우[여수골=狐谷], 개[蓋島=犬島], 개발=狗足島]나 노루[獐島]를 비롯해, 어미소[쇠머리산=牛頭山]와 송아지[소아치섬=犢島], 어미말[말섬=馬島]과 망아지[알마도=망아지 모양의 섬], 큰고래[大鯨島]와 작은고래[小鯨島], 곰[곰내]과 이리[狼島], 고양이[괴섬=猫島, 괭잇골=光陽浦]의 밥인 쥐[鼠峙島] 등등 대응되는 땅이름조차 흔하다.
‘소가 닭 보듯 한다’는 속담은 아무 관심 없이 서로 본둥만둥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수시 중흥동의 물목섬과 광양만(光陽灣)의 고양이섬은, ‘소가 닭 보듯’ 할 수 있는 거리를 훨씬 넘는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기이한 사연이 깃들여 있으니 우선 고양이섬과 쥐섬에 관한 사연부터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2. 고양이섬과 쥐섬
LG정유공장 앞의 월내포 선창에서 광양만 쪽을 건너다보면 해발 245미터의 봉화산(烽火山)을 정점으로 한 8.5 평방 킬로미터쯤 되는 섬이 손에 닿을 듯 자리하고 있으며, 양쪽 선창 사이는 나룻배로 10분이 채 못 걸리는 거리다. 예전에는 이 섬을 괴섬 즉 고양이섬이라 불렀다는데, 현지에서 전해 오기로는 섬의 모양이 마치 두 마리의 고양이가 누워 있는 형국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한 마리의 고양이가 웅크린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이 경우 섬의 동쪽 끝인 ‘지름머리’[기름머리=油頭]는 괭이(고양이) 꼬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섬의 서남쪽에 있는 쥐섬에서 바라볼 때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덥석 물기 위해 입을 딱 벌린 것처럼 파도에 씻겨 움푹 파진 바닷가의 바위 모양에 연유한 땅이름인 성싶다. 이 바위 부근을 현지에서는 ‘괴입(고양이 입)’이라 하고, 그런 게 또 한 군데 더 있기에 본디는 괴섬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묘도(猫島)로 바뀌었나 보다. <김형두, 정기섭>
한편 하늘에서 내려다본 쥐섬의 모양은, ‘고양이 앞에 쥐 꼴이란 속담이 영판 맞아떨어지게끔 죽자고 도망치다가 고양이 발톱에 걸리기 직전의 막다른 순간, 한껏 웅크린 채 발발 떠는 생쥐 형국인 바, 그 쥐섬이 바로 괴 입 앞에 있다. 또 쥐섬 동남쪽에는 눌은밥섬이라고 불렀다는 면적 0.1평방 킬로미터인 섬이 지도 1에서 보는 것처럼 자리잡고 있다. 독수리 형국인 영취산(해발 510 미터) 꼭대기에 올라 보면 독수리와 고양이가 서로 쥐와 눌은밥을 놓고 어느 것부터 먹느냐 하고 노리는 형국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3 섬을 관계지어 말하기를, 제 몸뚱이보다 열 배나 큰 괴섬(고양이섬)에서는 ‘밥 위에 떡’인 격으로 쥐와 눌은밥을 모두 확보한 고양이처럼 비록 큰 인물은 못 나올지언정 의식 걱정은 않을 부(富)를 누릴만한 지세라 했다. <정기섭>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들 사이에서는 눌은밥섬을 ‘보탱이섬’이나 ‘버티이섬’ 또는 ‘벌팅이섬’이라 부르는데, ‘보탱이’라 함은 ‘사과를 한 입 가득히 베어먹는다’고 할 때의 ‘한 입’ 즉 ‘볼’ ‘볼따구니’ 또는 ‘볼때기’에 해당하는 지역 방언이다.
과연 괴섬에 가서 보니 논밭은 물론 샘물까지도 흔한 편이라 500여 가구 3,000여 명의 주민들이 5개 부락으로 나뉘어 먹을 것에 대한 시름은 잊은 채 자급하는 고장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본디는 순 우리말이던 쥐섬과 눌은밥섬이 한자로 바꿔 적는 과정에서, 쥐섬은 서치도(鼠峙島)로, 눌은밥섬은 우순도(牛脣島) 우신도 또는 우승도로 둔갑을 하고 말았다. 눌은밥섬 또는 보탱이섬이 어찌하여 ‘소 입술’을 뜻하는 우순도로 바뀌었는지 나그네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어쩌면 적량 마을 뒷산이 큰 소가 누운 형국이라는 전설이 있으니 그 소의 입술이 이 섬이란 말일까? 어쨌든 순 우리말 땅이름이 서서히 없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빌어 쓸 적에는 음(音)으로도 읽고 훈(訓)으로 읽던 것을 요새 와서 온통 음으로만 읽는 데서 오는 폐단이 아닌가 싶다. 글자로 표기는 묘도(猫島)라 하더라도 읽을 때는 고양이섬이라 훈독해 온 것이 상례일 터인데 훈독은 없어지고 음독에 치우치는 바람에 그만 본디의 땅이름은 사라져버리고 한자에 매달려서 남의 나라 땅이름처럼 변하고 말았다.
3. 괴섬과 서씨(徐氏)
여기서 희한한 것은 고양이섬사람 모두가 의식 걱정을 않더라도, 쥐의 한자 표기인 서(鼠)와 소리가 같은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만은 이 섬에서 살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형두, 장형모, 김정견>
어쩌다가 서씨 성을 가진 새댁이 이 섬으로 시집을 오는 수도 있을 테지만, 호주인 남정네가 서씨 성을 가진 가정은 한 집도 없다. 그 내력인즉 서씨네가 이사를 왔다하면 실패만 거듭했다는 게 고양이섬 사람들의 증언이다. 한편 괴섬에서 서남쪽으로 아득하게 바라다 보이는 여수시 중흥동의 용성(龍城) 마을에 살던 이천 서씨네가 어쩌다 동북쪽의 괴섬을 향해 집을 짓거나 대문을 내고 보면 집안에 우환이 떨어지지 않았다니 고양이와 쥐[鼠=徐]를 둔 개연성에 뿌리박은 고약한 전설의 일면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육지에는 그리도 흔한 쥐가 이 고양이섬에는 살지 못한다는 얘기다. <권택한, 정기섭, 김정문> 이런 것들로 미루어볼 때 옛사람들이 빌어 쓴 한자는 뜻글자로서만 쓰여진 게 아님을 알겠다.
4. 동경이와 고양이섬
땅이름 따라 괴섬을 답사하던 어느 날, 나그네에게 한 가지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면, 그건 아주 귀중한 ‘동경이’ 즉 ‘꼬리 없는 개’를 한길에서 4마리나 한꺼번에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마음먹고서 이 괴섬을 뒤진다면 더 많을 개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지간한 국어사전에 볼라치면, 오래 전에 경주지역에 많았다고 하는 꼬리가 없는 개가 바로 ‘동경이’라고 올라 있는데, 그건 경주를 고려 때 4경의 하나인 동경(東京)이라고 부른 탓에 동경지방 즉 경주지방 특산 개 이름이 ‘동경이’가 된 것이다.
현지에서 ‘댕갱이’라 부르는 이 견공의 통칭은 표준말인 ‘동경이’가 변한 말로서 원산지와 발음이 같음을 알았을 뿐더러, 아이들이 가지고 날리는 꼬리 없는 연도 ‘댕갱이 연’이라 부르고 있음조차 확인되었다. <주종완>
오늘날 ‘동경이’는 원산지인 경주 지역은 물론 그 인근의 육지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희귀종이다.
필자가 오래 전에 경주에서 눈여겨본 ‘동경이’는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반면, 낯선 사람에게는 지독히 영악하게 달려들었고, 쥐와 참새 잡기쯤은 심심풀이고, 사냥 길에 올라서는 고라니와 노루를 추격해 잡을 정도로 용맹스러웠고, 진돗개와 북한의 풍산개에 어금지금을 다투리만큼 나무랄 데 없는 우수한 품종이었다.
‘견원지간’이라 해야 마땅할 고양이와 앙숙인 개. 그것도 희귀하기 짝이 없는 우리 토종개가 하필이면 고양이섬에서 발견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한 술 더 떠서 이 귀하디 귀한 ‘동경이’ 강아지가 꼬리가 없다는 것을 빌미 삼아 똥개 강아지보다 헐값에 팔린다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옛말에 ‘꽁지 오른쪽으로 짊어진 개를 키우면 의식은 걱정 없다’고 할 정도로 개꼬리의 존재는 중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오는 날 개 사귀기’라는 속담에서처럼 애완용 개에게 있어 꼬리만큼 거추장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도벨만이란 개의 꼬리를 강아지 때 일부러 잘라내어 아픔을 주면서까지 멋을 피우는데 비해 날 때부터 아예 꼬리가 없는 희귀한 토종개를 예로부터 간직해 온 우리 나라이고 보면, 개꼬리에 관한 한 서양을 훨씬 앞지르고 있지 아니한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발견한 ‘동경이’는 순종은 아니었지만 섬이라는 특수여건 하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혈통이니 만큼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순수혈통을 되살리는 희망이 없지 않을 듯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은 섬사람들에게 맡겨둘 성질이 아닐 듯 싶으니, 이 기회에 뜻 있는 육종학자나 유전전문가들이 발벗고 나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날렵한 몸매로 싸움에는 무척 다부지고 청각과 후각이 뛰어난 견공인 ‘동경이’! 누군가가 이 개의 핏줄을 되찾아 냄으로써, 우리 나라에 천연기념물을 하나 추가했으면 오죽이나 좋을지 모르겠다. ‘동경이’의 혈통 육종과 보존에 행정당국과 애견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기를 바란다.
5. 유두(油頭)와 정유공장
앞서 말한 괴섬의 고양이 꼬리에 해당하는 땅이름이 현지 발음으로는 ‘지암어리’ 또는 ‘지아머리’인데 표준말로는 ‘기름머리’란 뜻이다. 이 곳을 한자로 표기한 유두(油頭)란 말속의 기름[油]에 현혹된 일본사람들은, 괭이 꼬리부근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일제 때 탐사작업을 벌인 적도 있으나 끝내 허탕만 치고 말았다니 얄팍한 속셈이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LG정유공장이 삼일항에 들어서게 되고, ‘기름머리’ 앞바다에 대형 유조선이 정박하면서부터 이곳은 이름 그대로 기름머리[油頭]가 되고 말았으니 예언지명의 한 보기가 된 땅이름이다. <정기섭>
6. 활등과 용성마을
여수시 중흥동의 북쪽 바닷가에 용성(龍城)이란 자연부락이 있는데, 그 이름은 여천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취산(靈취山)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용이 광양만을 향해 용트림을 치며 내려가다가 혀를 내밀어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며 막 하늘로 치솟는 듯한 형국이라서 붙여진 땅이름이다. <김정견, 김형두, 조남근>
대지에 길게 뻗은 언덕의 끝머리가 힘차게 뭉쳐진 형상을 두고 풍수지리를 숭상하던 사람들은 용머리[龍頭]라 했던 까닭에, 남근(男根)에도 같은 이치를 적용하여 송이버섯 모양의 귀두(龜頭)를 용두라 했음은 물론, 남근 자체를 용(龍)이라 부르며, 욕된 표형으로는 수음(手淫)을 용두질이라고 한다.
그것이야 어쨌든, 마을을 감돌 듯 밋밋한 등성이의 모양이 활[弓]처럼 굽은 터라 예전에는 이곳을 ‘활등’이라 불렀고, 활등 동편에 들어선 마을에는 ‘복골’이란 땅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영취산의 기운이 이곳에 도착하였다는 한 스님의 말을 따라 복이 깃든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 영취산에는, 국가가 흥하면 사찰이 흥하고 사찰이 흥하면 나라도 흥한다는 ‘흥국사’가 있다. 그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이곳을 지나치던 이름난 큰스님께서 지세를 살피더니, 여기를 ‘활’ 형국으로 볼 것이 아니라, 흥국사 터에서 뻗어 내린 좌청룡에 해당하는 ‘용의 혈[龍穴]로 보아야 마땅하다면서 짚고 가던 지팡이를 길가에 꽂아놓고 떠나갔다. 그런 뒤부터 이 마을 이름이 ’복골‘에서 용성(龍城)으로 바뀌었고, 그 때 꽂아둔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 오늘날 용성 마을의 당산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권택한, 조남근>
한편 이 당산나무는 16세기경에 심었다고도 전하나, 아직도 고목이라고 부르기에는 활력이 넘치는 모습인데, 이 당산나무잎이 싱싱하면 들녘에 풍년이 든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그리고 용성 마을에 이웃한 마을은 ‘신평’이라 하는데, 그건 18세기초에 한 신혼부부가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하여, ‘새로울 신’자와 황야를 개척한 땅이라 ‘땅 평’자를 합하여 붙인 땅이름이다.
이곳의 지형을 용에다 비유한다면 호남석유화학 정문 건너편에 있는 삼일 주유소 자리가 바다를 향해 꿈틀거리는 용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고, 예전의 성화석유화학 지금의 MDI 공장 터가 용의 머리에 해당되는 바, 옛 지형은 지도 2를 참조하기 바란다.
용의 꼬리인 삼일 주유소 자리의 동산 위에는 이끼 낀 고인돌이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을 우연히 파보니까, 예스러운 자기 항아리가 한 개 나오더라고 한다. 뜻하지 않게 귀한 항아리를 얻은 마을 노파가 그걸 가져다가 장롱 밑에 소중히 보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무단히 아들이 몸져눕기도 하고 노파 자신도 삭신이 아프며 집안에 우환이 그칠 날이 없었단다. 그러자 미상불 그 고인돌 밑에서 나온 항아리 탓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쳐 재수 없는 항아리를 본디 없었던 셈치고 미련 없이 본디 있던 자리에다 밤중에 도로 파묻었더니 거짓말처럼 우환이 없어지더라고 전한다. 이 미신 같은 얘기는 실화의 한 토막이다.<삼일 주유소 사장 김정견>
7. 물목섬과 MDI 공장
마을에서 나이 드신 어른들의 기억에 따르면 용머리 부분은 동그스름하게 오똑 솟은 섬이었는데, 남북의 길이는 이 백 미터, 동서의 폭은 백 미터쯤 되며, 높이가 이십 오 미터 남짓한 크기였다. 섬 북쪽은 바다를 향한 용이 마치 입을 벌린 듯이 다소 움푹한 벼랑임은 물론, 그 앞에는 잔잔하게 경사진 갯바위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혀처럼 바다 속까지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김형두, 장형모, 조남근>
썰물 때면 용의 혀같이 길게 물위로 드러나는 갯바위도 밀물이 들면 20여 미터를 헤엄쳐 나가야만 할만큼 길쭉했다니 중흥부두의 진입 잔교가 호안과 직각을 이루지 않고 엇비슷하게 설계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잔교의 자취조차 없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인 바, 항만청 분실 뒤를 유심히 살펴보면 용 혀의 일부였음 직하게 거무스레한 갯바위가 삿갓조개와 굴껍질에 덮인 채 혓바늘 같은 옛 얘기를 전하려는 것처럼 바닷물에 잔잔히 씻기고 있다.
용머리 모양의 섬에서 중흥부두 잔교쯤으로 1 킬로미터 남짓한 바다 가운데는 들물[滿潮] 때면 등이 아물거리듯 보이다가 날물[干潮] 때면 사오십 평은 좋이 됨 직하게 물위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 즉 여의주라 부를만한 ‘여’가 있었다. <김형두, 장형모>
여기서 말하는 ‘여’란 바닷물 속에 잠겨 있는 바위인 암초를 뜻하는 우리말이고, 뒤에서 말하는 ‘곶’은 반도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그 ‘여’는 ‘복골’ 마을에서 가물가물하게 내다 보였기로 흔히들 ‘가물여’ ‘가문여’ 또는 ‘가무여’라 불렀다. 이 가물여는 대체로 펀펀하지만, 양쪽이 다소 높아 가운데는 흰모래가 살짝 깔릴 정도였다. 그걸 보기 나름으로는 용의 먹이인 개구리 같았다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용의 먹이가 여의주라면 모를까 개구리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데, 지금은 수토장의 둑 밑에 반 넘어 묻혀버려 겨우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로써 용의 머리와 목, 입과 혀 및 여의주, 용의 몸통과 꼬리 등이 제대로 줄지어 꿈틀거리는 모습이 새벽 꿈결처럼 안개 속에 떠올라 보이는 듯하다.
MDI 공장 터는 예전에 ‘물목섬’이라 부르던 용머리 모양의 섬이 나중에 ‘곶’으로 변한 자리에 해당된다. 용머리처럼 오똑하던 섬은 남쪽의 육지와 조금 떨어져 있었으나, 긴 세월동안 파도에 밀려나온 조개 껍질과 모래가 섬 뒤쪽으로 쌓여가면서 차츰 연육도(連陸島)로 변해갔다. 그래서 보통 때는 용의 몸통과 이어졌다가도 사리 때면 용의 목에 물이 넘어갈듯 말듯하게 차오를 정도로 가는 목으로 이어졌기에, 이 섬은 ‘물목섬’이란 땅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자를 빌어 적는 바람이 불어 그만 수항도[水項島=水港島=水港道]로 변했지만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수항도가 아니라 ‘물목섬’이라 불러야 옳다는 옹고집을 갖고 있으니, 우리가 본받아야 마땅할 미덕이라 하겠다. ‘물목섬’을 한자를 빌어 쓰자니까 수항도(水項島)로 표기했을지언정 그걸 읽을 때는 이두나 일본어처럼 적었을 때의 의도대로 ‘물목섬’이라 불러야만 옳은 것을 한자식으로 읽는 바람에 그만 ‘수항도’ 또는 ‘수왕도’가 된 것이다.
‘목’ 또는 ‘목섬’이란 땅이름은 전남 여수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바, 여수 소라면 금오도 동북쪽의 물목섬[水項島]을 비롯하여 여천 석유화학단지 앞의 물양장이 된 딴목섬, 소호동의 목섬[項島], 율촌면 조화리의 모래목[砂項]과 화정면 낭도 남쪽의 목섬[木島], 개도[蓋島]의 대리목[다리목=月項], 그밖에 사슴목[獐項], 울목[泣項], 까랑목, 무네미목[水越項], 무실목[戊戌項=無實項], 활목[弓項] 등등 숱하게 쓰이고 있음을 본다.
예로부터 중흥부두가 자리한 해안선은 북쪽의 광양만을 가로질러 온 하늬바람이 무섭도록 휘몰아치는 지형적 영향으로 작은 고깃배를 대어 놓을 마땅한 장소가 없었으나, 물목섬 동편으로 돌아들면 섬의 동남쪽에 언제라도 모진 북풍을 피할 수 있어 아늑하기 짝이 없는 천연의 포구가 있었다. 그래서 농업 반 어업 반으로 살아가던 용성과 새동네[新坪]의 갯마을 사람들이 여기에다 고깃배를 매어 놓곤 했으니, 뱃사람에겐 타는 목젖을 축일 막걸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광복 무렵만 해도 한 노파가 잔술을 파는 오막살이 주막 한 채가 물목섬 기슭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 물목섬 선창에서 일제 때는 일본사람들이 농민에게서 수탈한 목화와 공출미를 실어 나르는 돛단배가 들락거렸고 광양이나 하동 장날에는 굵은 배[큰배]가 흰옷 입은 장꾼들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단다.<김형두, 장형모>
지금은 비록 여의주를 희롱하며 비상천(飛上天)하던 용의 형상이야 찾아볼 수 없을지라도 그 용이 지녔던 웅비의 기개나 정신만은 MDI 공장 터에 지기(地氣)로 남아 있다.
8. 물목섬과 중흥천(中興川)
여수시 중흥동의 복골 마을을 지나 바다로 내려가던 중흥천은 활등의 바른쪽 옆구리를 따라서 물목섬의 동편으로 흘러들었는데, 중흥부두를 건설하려니까 그 개울이 공사용 도로와 준설토 투기장의 안쪽으로 흐르게 되어 여러 모로 공사에 방해가 되었기로, 물길따라 흘러온 개울의 방향을 투기장 바깥으로 돌여놓는 게 상책이었다. 이 수로 변경을 위해 바닥 너비가 21 미터이고 연장 길이가 650 미터에다가 기울기가 600분의 1인 사다리꼴 수로를 석축과 콘크리트로 만들게 됐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체수로(附替水路) 공사였다. 따라서 지금의 중흥천은, 물목섬 자리였던 MDI 공장 서쪽을 돌아 공장 정문 앞 교량인 신평교를 지나게 됨으로써 하구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는데, 이 부체수로 공사가 완료된 시기는 1978년의 첫추위가 몰아닥치던 11월 말이었다.
중흔부두를 계획할 당시만 해도 토목 기술자들은 물목섬을 깎아 거기서 나오는 양질의 점질토를 항만축조용 도로를 만드는데 쓰고, 표고 25미터 남짓산 묏봉우리를 해면 기준 6.2미터 높이를 낮출 때 나오는 바위덩이는 호안공사용의 농덩이바위(Armor Rock)로 써볼 심산이었다고 적고 있으나<여천공업기지 건설지>, 막상 파고 보니까 부식암 및 연암에 가까운 푸석한 암석만 쏟아져 나왔다니 활등에 엎드렸다가 허리가 잘린 해묵은 용은 몸뚱이의 자취조차 없어짐을 속으로 한탄하며, 노심초사한 나머지 머리뼈까지도 삭아버렸단 말인가?
물목섬을 깎을 때 나온 흙이 4만 입방 미터요, 연암(軟岩)이 2만 1천 입방미터에다 경암(硬岩)이 12만 3천 입방미터로 도합 18만 4천 입방미터였다니, 물목섬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이 섬은 중흥부두 건설 당시까지도 용성녹지(龍城綠地)라 불렀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채 무심한 하늬바람만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MDI공장 꽃밭 머리에서는 자주빛 암석 조각이 더러 눈에 뜨이고 있으니 그게 결국 없어진 용머리의 흔적이랄 수 있겠다. 중흥부두는 수심 6.5미터로 3,000톤급 3 선좌가 있으며, 약 20 개월(1978. 2-1979. 10)이란 건설기간과 57억 원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9. 각시바위와 고양이섬
물목섬의 해안에 오뚝한 바위 하나가 혓바늘처럼 돋아 있었는데 사람에 따라 그걸 ‘각시바위’라고도 했고 남근석(男根石) 같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가장 지배적인 각시바위설에 의하면 그건 여근(女根)의 감씨[陰核=Kongal]를 닮았더란다. 까투리가 있으면 장끼가 있게 마련이듯이 각시가 있으면 서방이 있을 법한 일이 아닐까? 이를테면 여수시 삼산면의 거문도 동쪽 해상의 하백도에는 각시바위에 대응되는 서방바위가 존재하기에, 광양만 일대도 뒤져보면 서방바위에 해당되는 것이 있음 직했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한 대신, 다음과 같은 옛 얘기를 채집할 수 있었다.
우선 각시바위란 것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여인의 하체를 닮았으며 감씨가 특히 두드러졌더란다. 양 허벅지 사이로는 흰모래가 깔렸고 그 가운데 오뚝하게 솟은 바위는 능히 목선 한 척을 비끌어 맬 수 있는 벅수[장승] 크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밀물과 썰물 따라 허벅지 사이로 바닷물이 잔잔하게 밀려왔다가 밀려가기를 거듭했다니 자연은 참으로 오묘한 이치까지 나타내 보이고 있었음일까? 하지만 샛바람[東風]이 불어 파도가 거센 날은 갯바위에 부셔지는 물보라 때문에 각시바위 가까이는 도저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 했더란다. 그래서 물목섬의 주막집은 물론 복골 마을 사람들조차도 이렇듯 묘하게 생긴 각시바위에다 치성을 드렸다. 처음엔 뱃길의 안전을 비는 뜻에서 시작했을 테지만 왼새끼를 꼬아다가 바위 주위에 빙 둘러치고서 해마다 제사 지내기를 거듭해 왔으며, 또 고기잡이 나갔던 어부는 그들 나름으로 각시바위 곁을 돌아 나올 때면 으레 ‘태에’ 또는 ‘고시대에’[고시례] 하면서 잡아오던 생선 몇 마리를 각시바위 쪽에다 던져주곤 했단다. <조남근>
그렇지만 고양이섬의 괴입쪽에서 건너다 볼 때 자욱한 물안개 너머의 대안데 위치한 각시바위는, 괴섬 사람들에게 있어 어쩐지 꺼림칙한 존재였다. 마치 용과 고양이가 서로 입을 벌리고 으르릉거리는 대치 현상으로 보여, 용의 해코지나 각시바위의 잠재적 힘이 괴섬까지 미칠 것만 같았다. 이건 용호상박(龍虎相搏)에다 견줄 바가 못되니 용묘암투(龍猫暗鬪)라고나 할까? 용과 고양이가 으르릉거려 봤자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해 6.25가 터지자 평화롭던 갯마을의 젊은이들은 너나없이 싸움터로 출정했다. 불행스럽게도 괴섬의 청년들은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참화가 생겼고, 이를 괴이쩍게 여긴 괴섬 사람들은 아무래도 용의 아감지[口] 속에 돋은 각시바위의 숨은 음기가 괴입을 향해 독안개를 뿜어내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은 나머지 용성 사람들 몰래 감씨꼴의 바위를 떼어내어서는 깊은 바닷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나보다. 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 지내던 용성 마을의 고깃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나운 풍랑에 휩쓸려 파선되는 바람에, 십여 명의 장골들이 한꺼번에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돌풍 탓으로 생긴 액운이려니 생각했으나 점괘를 보고 온 아낙네의 말마따나 각시바위가 참말로 부셔져 있길래 ‘엇뜨거라’ 싶은 마음이 일더란다. 각시바위가 깨어졌다 함은 유태인의 할례(割禮)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므로 마을 장골들의 죽음과의 사이에 어떤 개연성이 있음 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뜻을 같이하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바깥마당의 들돌보다는 크고 짐돌보다는 작은 감씨 조각을 찾아 헤맸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그게 누구의 소행인지 또 어디에다 버렸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일인지라, 떡심이 풀린 마을 사람들은 부셔져 나간 것과 흡사한 바위덩이를 대신 주워와서 미리 준비해 간 명태랑 세 가지 과실 등속을 제물로 놓고 조촐한 제사를 모시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 후에, ‘돌가루'[Cement]로 감씨 봉합수술을 하기에 이르렀다니, 젊은 주검을 안타까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끈질긴 내면을 보는 듯하다. <조남근>
그런 뒤로는 각시바위의 영험이 되살아났는지 마을에 큰 액운은 닥치지 않았는데 마을 앞에 새길[新作路]을 닦고, 철도를 부설하느라고 용혈(龍穴)의 잔등을 자른 셈이고 보매, 그래서 그런지야 알 수 없지만 꽃다운 젊은이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잦았다. 뜻하지 않던 소년죽음이 또 생겨나자, 각시신의 노여움으로 말미암은 불길한 징조로 여긴 마을 사람들은 이 각시바위에다 푸짐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10. 물목섬의 주막집
물목섬엔 조촐한 주막집이 한 채 있어 뱃사람들이 컬컬한 목축임을 했음에 더하여, 때로는 마을 사람들의 윷놀이 터도 됐고 한가한 시간에는 외딴집답게 노름판을 벌인 적도 없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선창에 가려면 썰물 때는 섬 기슭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밀물 때면 물목섬 동편으로 마을 깊숙한데 위치한 흥국 여인숙 뒤에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때문에 용머리산 꼭대기로 난 외갈래 길을 넘나드는 것이 상책이었다. 숲속의 어둑한 오솔길을 혼자서 걷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머릿끝이 쭈볏쭈볏 올라가면서 자신의 발자국소리에 놀라기도 했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궂은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저녁 물때에 발을 쳐둔 데를 돌보거나 주낙이라도 걷을 양으로 각시바위 쪽을 돌아나갈라치면 홀연히 흰 옷자락을 나부끼는 각시[女人]의 형체가 춤을 추는 듯 어른거리는 걸 목격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어쩌랴! <조남근>
그러던 어느 해, 조개잡이 배를 타고 나간 주막집 아들이 모진 풍랑으로 말미암아 바다에 빠졌는데 어찌된 영문이지 시체조차 떠오르지 않는 횡액이 발생했다. 이에 화가 난 주막집 사람은 물론 마을에서조차 각시바위에 대한 정성이 식고 말았는데 그 뒤 무서운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지나갈 때 산더미 같은 해일이 덮쳐 그 주막집조차도 물보라 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니까 그것도 벌써 40년전 얘기가 되고 말았다.
11. 성신앙(性信仰)
용성 사람들이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하는 날이면 의당 ‘동네 샘’이나 ‘당산나무’에서 시작함이 순서일 터인데도 언제나 마을 밖에 있던 각시바위에서 풍물놀이를 시작했음은 물론,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해묵은 당산나무에 제사를 드리는 법이라곤 없었다니 보통 마을과는 전혀 다른 일면이 아닐 수 없다.
각시바위는 이름난 굿터였으므로, 마을에서 소년죽음이 생긴 지난 1989년 봄에도 큰굿을 벌인 적이 있으며, 그 때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 물목섬의 각시바위가 있던 곳을 쳐다보고 길놀이를 시작하므로써 각시바위에 대한 성신앙적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 단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사진 참조)
인간이 생식기 형상의 자연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성신앙은 신석기시대 이래의 오랜 습속이었다. 전국 도처에 흩어져 있는 거석문화의 유적을 살펴볼 때 남근석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총각바위, 자지바위, 심하게는 좆바위(좆바구: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라고 부르고, 여근석은 요강바위(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각시바위, 치마바위, 밑바위, 보지바위라 일러온다. 프로이드의 학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뚝 솟은 것은 남성이요 움푹 파진 것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는 것쯤은 석기시대부터 상식이었나 보다. 우리 조상들은 바위뿐만 아니라 남녀의 성기를 닮은 자연 지형에다 수복강령과 소원성취를 비는 치성을 드려왔다. 이런 무속문화는 민족의 심성 밑바닥에 짙게 깔린 기층 문화랄 수 있다. 굿은 샤먼이고, 샤먼은 무(巫)요, 무는 곧 신정일치 시절부터 자연인 하늘과 통했기에 우리 생활 속에 내림으로 이어져 온 습속이었다.
이러한 성신앙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숭상되어온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일본 유구열도를 비롯하여 동아남아시아의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는 물론 멀리 남태평양에 떠있는 폴리네시아 섬들에서도 성신앙의 유적이 발견되고 아주 멀리는 마야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앙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음을 본다.
생식기 모양의 거석이 없는 지역에서는 일부러 나무로 남자의 성기 모양을 다듬어 놓고 숭배하기도 했는데,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신남기리가 그 좋은 보기다. 남근석과 여근석은 풍농과 풍어, 자손 번영과 더불어 각종 전염성 질병과 기아 및 풍수해 등 자연 재해로부터 액막이 구실을 해왔다. 따라서 거석 부근의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영험함을 의심하는 이가 드물었으니, 오늘날에 와서 성은 진부한 것 또는 외설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성신앙 자체를 기속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하지만 거석이나 기암이 있는 마을에서는 그곳을 신역으로 섬기면서 정월 대보름과 칠월 칠석에 거석 주위에다 금줄을 둘러치고 부근에는 귀신을 쫓는다는 황토를 뿌린 다음 3색 과실과 정갈한 제수를 진설해 놓고 목욕재계한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벌였고 때로는 귀한 자식을 점지해 달라도 남모르게 치성을 드리곤 했었다.
그런데 은밀히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이 이슥해지면 용성마을에서 홀로 사는 아낙들만 모여 쥐도 새도 모르게 각시바위에다 제사인지 치성인지를 드렸다는 후문이 있으니 그 아낙들의 소원이 무엇이든 간에 비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으련만...... 혼자 사는 여인들의 속마음을 어느 누가 짐작인들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자연은 너무도 엄숙할 만치 찬란한 것. 중흥부두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물목섬에는 해묵은 괴목(느티)나무와 포구(팽)나무에다 아름드리 도토리나무와 소나무 밤나무 등의 잡목 숲이 무성하여 경치가 대단히 아름다웠으며 용성 들판에 흐드러진 종다리 노래 울려퍼지는 봄날이면 까투리가 양지바른 데다 보금자리를 틀었고 숲 속에는 멧비둘기를 비롯한 멧새 방울새, 박새, 따까치, 휘파람새, 뻐꾸기, 꾀꼬리, 동박새 등이 노래하고 왜가리와 백로 및 해오라기가 모여들어 바닥에는 하얗게 똥이 깔리기도 하였다.
물목섬 바깥의 ‘여끝’이라는 갯바위에서 소년들은 낚시질을 즐겼고 작렬하는 태양 아래 말매미가 목청을 자랑하는 여름날 갯벌에서 할미새와 물떼새가 꼬리짓을 하는 동안 벌거벗은 하동들은 뻘밭에서 재잘거리며 반지락(바지락)조개를 줍기도 했다. <김형두, 장형모>
산업화 과정에서 묻혀 옛 정서와 함께 순 우리말 땅이름들이 슬금슬금 사라져감이 못내 아쉽다.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 나이는 1989년 현재)
권택한(53세) 여수시 학동 30-7번지 흥국사 불교신도회 회장
金政見(49세) 여수시 중흥동 호남유조(주) 대표이사
김정문(46세) 여수시 중흥동 59번지 바보 농원 대표
金亨斗(71세) 여수시 중흥동 신평부락 노인회 회장
嚴宗喆(54세) 여수시 중흥동 용성부락 지역 유지
張炯模(78세) 여수시 중흥동 신편부락 노인회 총무
全宗祐(54세) 여천시청 산업과 지역경제 계장
정기섭(66세) 여수시 중흥동 묘도동 읍동부락 지역 유지
조남근(53세) 여천시 중흥동 용성부락 지역 유지
주종완(5세) 여수시청 회계과 용도계장
참고 문헌
산업기지개발공사 <여천공업기지 건설지> 1982
여천시 <여천지구 출장소 10년사> 1986
연합통신사 <월간 세계> 1988년 9월호
편집위원회 <여수, 여천 향토지> 1982
편찬위원회 <여천시 마을 유래지>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