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한 달 만에 결혼

사투리76 2019. 3. 11. 00:27

한 달만에 결혼


아마도 처녀로서는 영 재미도 없고 많이 지루했을 테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실질적인 중매는 건천역 부근에서 정미소를 크게 하던 종동 어른이 서고, 표면에 나선 분은 전직 역장이었던 김대복 어른 내외였다.

종동 어른은 우리 마을 앞에서 건천역에 이르는 아주 드넓은 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잘감보의 봇도감으로서 키는 작지만 대단히 다부지고 옹골차며 지도력과 포용력을 두루 갖춘 어른으로, 자타가 존경하는 분이었다. ‘잘감들은 남북의 길이가 1,200미터에 동서의 폭이 500~600미터쯤 되는 아주 크고 기름진 들판이다. 또 역장이었던 김대복 어른이 그땐 퇴직을 했지만 오랜 기간 우리 집과 친밀한 교분을 갖고 서로 오가며 정을 나누던 집이었다. 

 

어머니가 쌀장사를 할 때 종동댁 정미소에서 많은 쌀을 매입했기에 그 종동 어른이 쌀장수의 아들인 나를 눈여겨봤던 모양으로 저 월천댁 아들과 이대곤 씨 딸의 중매를 서고 싶은데, 본인이 전면에 나서서 직접 중매를 들면 뒤끝이 아름답지 못한 일이 더러 생긴 까닭에 자기는 뒤에 서고 김대복 영감을 앞세우게 되었단다. 

 

일요일 밤차를 타고 나는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갔고, 고향에서는 양쪽 집에서 서둘러 사주단자를 보내고 날을 받고 하여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때가 음력으론 섣달이라 해를 넘기지 말자는 것이 처녀 쪽 입장이었고 기왕 할 바에는 잡음이 생기기 전에 후딱 해버리는 것이 온전하다는 생각이 겹쳐 일이 성사되게 되었다. 

 

결혼식을 하는 방식에 있어, 부모님의 생각엔 사모관대를 걸친 구식결혼식을 선호하고 나는 예식장에서 행하는 신식을 선호했다. 구식으로 하느냐 신식으로 하느냐로 한동안 밀고 당기다가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내가 신식 결혼식을 대구에서 올렸는데 그날이 1965112일이라 소한 땜을 어찌나 하는지 춥기는 또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내려간 날 완전히 꽁꽁 언 상태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저녁 기차를 타고 해운대로 신혼여행이란 걸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