唱·탈춤·그림자극 어우러진 '땅설법' 아시나요?
唱·탈춤·그림자극 어우러진 '땅설법' 아시나요?
조선일보 2019-04-05 MH2 [A23면]
'땅설법' 한국 불교서 전승되던 설법 형식, 지난주 조계사서 시연회 열어 춤추고 노래하고 저글링까지… 삼척 안정사 스님·신도들이 보존
지난 30일 조계사에서 다여 스님(오른쪽 끝)과 신도들이 땅설법을 시연하고 있다. 땅설법은 북과 장구, 탈, 그림자극 등 다양한 소품을 동원해 부처의 가르침을 중생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쳐주는 ‘종합예술’이다. /이진한 기자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우물신이오~" "어떤 일을 하시나요~" "모든 중생을 풍파에서 벗어나게 하지요~".
종이로 만든 성주신 탈을 쓴 스님이 노래로 묻자 바가지로 만든 용(龍) 탈을 쓴 신자가 노래로 답한다. 무대엔 호랑이·소·말·개·뱀 등 동물 모양 탈을 쓴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해 덩실덩실 춤추며 스님과 노래를 이어간다. 접시 돌리기와 공 3개를 돌리는 저글링까지 등장했다. 구성지게 꺾어지는 소리는 창(唱)이나 민요처럼 들리고, 탈춤 놀이마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불교의 가르침이다. 국내에선 명맥이 끊어지다시피한 '땅설법'이다.
토요일이던 지난 30일 서울 조계사 경내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한국불교민속학회(회장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주최로 강원도 삼척 안정사 주지 다여(茶如·51) 스님과 신도들이 땅설법 시연을 펼쳤다. 땅설법은 한국 불교에서 전승되던 설법의 한 형식. 가르침[講]과 노래[唱], 연극[演]이 어우러져 흥겹고 쉽게 부처님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하는 '종합예술'이다. 부처님이 천상의 신들에게 화엄경을 설(說)하는 것과 비교해 지상(땅)에서 스님이 일반 중생을 대상으로 설법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석가모니 일대기' '목련존자 일대기' '성주신 일대기' '선재동자 구법기' 등 여섯 마당이 전한다. 한 마당이 길게는 8~10시간씩 이어진다고 한다.
이날 시연은 땅설법이 사실상 서울에 처음 소개되는 자리. 공연장 250석은 일찌감치 다 차서 일부는 서서 관람했다. 청중 가운데는 천주교 수녀도 있었다. 시연회 내내 박자에 맞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다여 스님과 신도들이 시연한 작품은 '석가모니 일대기'와 '화엄성주대재'의 일부로 1시간에 걸쳐 짧게 요약했다. 화엄성주대재의 경우, 집을 수호하는 성주신이 귀양 가는 길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마당신, 우물신, 변소신 등이 나타나 도움을 받는다는 줄거리. 이들은 성주신을 도운 뒤 "성불(成佛)하거든 중생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성주신은 부처님 법회에 참석해 화엄경을 듣는다. 이 같은 땅설법의 내용은 전통 민속이 불교에 스며든 흔적을 보여준다.
그동안 국내에서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땅설법이 살아남게 된 배경은 역설적이다. 안정사는 강원도 삼척 시내에서도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산골에 있는 작은 절. 토박이 주민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다. 조계종 소속 사찰도 아니다. 조계종은 민간 신앙과 연결된 불교 의식을 대부분 터부시했다. 안정사는 조계종 소속이 아니었기에 종단의 제지 없이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 다여 스님 역시 토박이로 어린 시절부터 절에 살면서 구전(口傳)되는 대사 내용을 외웠다. 스님은 "저는 다른 절에 살아보지 않아서 모든 절에서 땅설법이 전수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안정사에서 전수되던 땅설법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작년 10월 안정사, 12월 위례신도시 대원사에서 시연회를 하면서다. 불교민속학자들은 흥분했다. 조계사 시연회에 앞서 열린 '땅설법의 계승과 발전 방안' 주제 토론회에서도 학자들은 "불교 무형 유산의 소중한 맥이 끊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록하고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홍윤식 교수는 "신라 때부터 붐을 이룬 화엄 사상이 어떻게 민중화됐는지 보여주는 게 땅설법"이라며 "한국 불교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땅설법 내용을 채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여 스님은 "평소 신도님들과 함께하던 땅설법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는데 귀(貴)하게 여겨주시니 얼떨떨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