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모자와 석유난로
굴뚝 모자와 석유난로
굴뚝 모자를 벗기자 연탄은 정상으로 타기 시작했지만 방은 더 데워지질 않고 계속 더 추워졌다. 어쩌면 좋을까? 이리저리 알아봤더니 일본에서 특별히 수입한 석유난로란 것이 있다는데, 상공부 직원에게만 혜택이 간다기에, 상공부에 다니던 대학 친구인 이홍부 씨에게 부탁했더니 재깍 한 대를 구해 주었다. 친구가 좋긴 좋다,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풀어봤더니 어럽쇼? 그건 내가 생각했던 가정용 석유난로가 아니라, 일본의 ‘토끼 사육 난방용’이라 쓰여 있어 매우 놀랐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럴 수가? 일본의 토끼 사육장에나 놓는 석유난로를 우리는 수입해서 상공부 직원에게만 나눠주고 있다니? 하지만 그 수입품 난로 덕분에 비교적 훈훈하게 겨울을 나는 동안 아기도 튼튼하게 자라 우량아가 될 것이 역력하였다.
어머니가 아우들을 키울 때는 모유가 남아돌았기에 학교에 갔다 온 내가 동생이 먹다 남긴 젖을 빨아먹곤 했는데 어머니의 젖은 참 달콤했다. 그래서 나는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면 누구나 모유가 충분히 나오는 줄 믿었는데, 아내의 젖은 그렇질 못해서 처음엔 한수(장남)가 배를 채우지 못했다. 다행히 그때 분유란 것이 판매되어 그걸 먹고 아이가 참 무럭무럭 자라서 우량아 후보자가 되어 단골 소아과의 추천으로 ‘비락우유’의 우량아 선발대회에 출전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잠이 드는 바람에 우량아에 뽑히는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매우 튼튼하게 자라 참 자랑스러웠다. 한수를 데리고 외출할 때면 워낙 체중이 많이 나가서 나는 허리의 한두뼈(허리뼈) 위에다 아이를 올려놓고 몸을 기울여서 아이와 내가 Y자 꼴이 되어야 겨우 평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참 자랑스러웠다.
나의 대학 친구들은 두 패거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정법대학, 문과대학, 상과대학, 이공대학 등에서 한 명씩(고정남, 오만세. 전화국 근무자, 중국어 전문가 등등 그 이름들조차 이젠 잊어버렸네) 섞어서 모이는 패거리였고, 또 하나는 부산에서 같이 서울 본교로 올라온 패거리(강호선, 김관일, 김성영, 이홍부, 조정래)였는데, 앞쪽 패거리가 나의 득남을 축하해 준다기에 그 콧구멍만 한 방에 여남은 명의 신랑각시들이 포개고 앉아서 식사를 나눈 적이 있다. 그래도 뭐 별로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신접살림인 탓에 그릇이 모자라서 접시에다 밥을 담을 정도로 소꿉장난처럼 손님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