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낄로와 맘마짜
제 1부 행복했던 순간들
따낄로와 맘마쨔
아기들은 대부분, 두 돌 전후가 되면 제법 자기 의사를 말로 표현하게 되는데, 큰애 한수는 뭔가 기분이 좋으면 ‘따낄로’란 소리를 자주 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좋다는 뜻임에는 틀림없었다. 또 ‘께끼께’란 소리도 더러 하였는데 그건 아마도 ‘아이스케키(얼음 막대기)’ 장사가 외치는 소릴 흉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포로몬하다’는 말도 종종 했는데, ‘피곤하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아이가 뭐 피곤할 일이 있었으랴만, 퇴근하는 나를 보고 아이 엄마가 ‘오늘도 수고했지요’란 뜻을 담아 ‘피곤하시지요’라고 하는 말을 가끔 듣고 ‘피곤’이란 말을 배운 걸까? ‘피곤’의 발음이 어려우니 ‘포로몬’으로 바뀐 걸까?
좀 자라서는 제 누이동생을 ‘보슬아!’라고 부르기가 쉽
지 아니한지 늘 ‘보라야, 보라야’라 하는 통에 집에서는 보슬이의 애칭이 ‘보라’가 되고 말았다. 그건 애들 삼촌인 성촌(아우. 김동석)이가 제 동생인 ‘광석’이를 ‘광아’라 부르고, 가평(아우. 김광석)이는 성촌이의 어릴때 이름인 ‘종석’이를 쉽게 ‘종아’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큰아이 한수는 별칭으로, 제 고모나 숙부들이 ‘칸’이라 불렀고, 보슬이는
‘뽈’이라 했으며, 병수(차남)는 ‘찐’ 또는 ‘삥’이라 불렀는데, ‘칸’이나 ‘찐’ ‘삥’은 아마도 중국어를 익히던 성촌(아우)이가 중국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보고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수는 또 고향집에 가면 통나무를 파서 자루가 길도록 크게 만든 ‘자루바가지’를 가리켜 “왜 바가지에 꼬리가 달렸느냐”고 묻기도 했고, 초승달을 보고는 “달이 부서졌어.”라고 해 어른들을 놀라게도 했으며, 나아가 ‘그림 속의 호랑이를 밖으로 불러만 내 준다면 내가 한 대 때려주겠다.’고 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당동에 살 때니까 아마 대여섯 살 때가 아닌가 싶고, 아이들의 생각이 참 자유분방하고 순진하며 접근하는 방식이 어른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여동생 권실(김경숙)이는 누가 “너는 왜 고추가 없니”라고 물을라치면 “부동 개 물어갔다.”고 했는데, 장승동 우리 옆집에 살던 ‘부동댁의 개가 내 고추를 물어가서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또 광복 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이니까 일본말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아! 그래요’ 하는 뜻의 일본말인 ‘소 대수까’도 흔히 쓰곤 했는데, 학술 숙부님이 권실이의 말에 “소 대수까”라고 할라치면 꼭 꼭 “소 대수찌 마라.” 하며 완강히 저항했다. 아마도 ‘소 대수까’를 뭔가를 쏘는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가평이는 “우리도 끌 하나 사자.”라고 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식은 보리밥을 쉽게 떼어 낼 수 있는 끌을 하나 구하자는 말이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름에는 보리쌀 곱삶이를 한 꽁보리밥을 주로 먹었는데, 밥이 따뜻할 때는 찰기가 없어 버그르르한 반면 점심때쯤 완전히 식고 나면 한 덩어리로 양푼째로 굳어져서 숟가락으로 뜨려고 해도 잘 안 떠지기에, 그걸 쉽게 떼자면, 엿장수들이 가지고 다니던 끌을 하나 사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 시절 군것질에 으뜸인 것이 엿이었고, 헌 고무신이나 낡은 삼베옷을 갖다 주면 엿과 바꿔주던 시절이었는데, 겨울 엿장수는 가래엿을 파니까 떼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지만, 여름 엿장수는 엿이 완전히 녹아 엿판에 한 덩어리로 퍼져 있는 까닭에, 손가락 넓이만큼 되게 끌을 갖다대고 엿장수 가위로 그 끌을 톡톡 치면 굵은 엿가래처럼 엿이 쉽게 떨어져 나오곤 했기에, 그런 엿장수 끌을 하나 구하면 식어서 덩어리진 꽁보리밥도 쉽게 뗄 수가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나 보다.
아이들 말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성촌이가 어렸을 때, 흐르는 코를 제가 싫다는데 닦아줄라치면, 싫다는 말을 ‘코 붙이’ 즉 닦은 콧물을 도로 붙여내라고 울었고, 눈물이나 오줌조차도 ‘눈물 붙이’ ‘오줌 붙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럴 때는 콧물이 묻은 손수건이라도 자기 코에 갖다 대면서 “자, 여기 붙였다.”고 하면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다. 아마도 그 울음을 그치자니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겠지. 그러다 보니 ‘코 붙이’란 얘기가, 장성한 후에까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우리 집 성촌이만 ‘눈물을 붙여 내라’는 것이 아니고, 눈물 붙여 내라는 사람이 따로 또 있으니 그는 바로 경주 최부자집 주손(冑孫)인 최염씨다. 그 역시 어린 시절 울면서 ‘눈물 붙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The 큰 바보 경주 최 부자, 1. ‘숨겨져 있던 놀라운 이야기들』(두두리 출판사2018)이라는 책에 실린 것을 읽었다.
월천 어른이 부산 영도의 청학동에서 학술 숙부님과 함께 돼지를 키울 때, 어린 대석(사촌동생)이도 코를 좀 흘렸는데, 걔는 ‘코 붙이’라는 성촌이와는 반대로, 큰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큰아빠, 코 앆어’ 소릴 자주 했는 바, 그건 ‘코를 닦아 달라’는 소리로 성질이 깔끔한 편이었나 보다. ‘닦어’ 소리는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앆어’로 변형된 모양이다.
보슬이는 어릴 때 “엄마는 지금 뭐하느냐”고 물으면, 마치 유도 심판이 선수에게 지도(指導)를 줄 때처럼 두 팔목끼리 급하게 감는 흉내를 내며 “쉬 쉬 쉬”라고 했는데, 아직 ‘설거지’를 하는 중 또는 ‘설거지가 끝나지 않았다’는 표현이었다. 보슬이는 자라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꼭 “엄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뭔가 미안한 일이 있으면 “야옹아, 미완하다.”고 했는데, 어디 동화책에 나오는 구절을 외워서 쓴 듯하다. ‘밥먹자’는 말은 “맘마 쨔아!”라고 했다.
병수(차남)는 경주 고향집에 갔을 때 할아버지께서 주신 곶감을 한입 베어 물더니 “아 참, 독하다, 독해!”라고 했는데, 제가 먹던 일반적인 과자의 단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곶감의 독특한 단맛이 ‘독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준협(조카. 성촌의 아들)이가 어릴 적에 독산동 제 큰집에 와서 밥을 먹을 때, 부엌에서 일하느라 미처 방에 들어오지 아니한 제 큰어머니를 “어서 들어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부르라.”면, 꼭 “큰엄마 빠시오.”라고 해서 우리를 즐겁게 했다. ‘빠시오’는 액체를 빨아먹는 ‘빠시오’가 아니라, ‘큰어머니 빨리 들어오세요’가 줄어든 준협이의 말이다. 아마 ‘빨리 오세
요’라 발음하기가 힘드니까 나름대로 줄여서 만든 말이겠지.
아이들은 두 돌쯤일 때는 음절수가 많은 말을 하기 어려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음절수를 줄여서 말하는 특징이 있는데, 재우(손자)는 좋아하는 ‘라이온 킹’ 비디오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곤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The End’가 나오면 꼭 “아빠 차쟈 낼 보자!” 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그건 ‘아빠 사자가 나오는 비디오를 오늘은 그만 보고 내일 또 다시 보자’는 말이었다. 걔는 ‘비둘기’를 가리키는 말도 자기한데는 음절수가 좀 많은 편이니까 그냥 짧게 ‘비’라고 표현했고, 모든 새 종류도 다‘비’라고 했다.
유정(질녀)이가 질문해 왔을 때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아!”는 소릴 했다. 희준(외손녀)이는 “아빠, 자동차가 뭐야”라고 물으면, 잔뜩 힘을 주며 “티이뷰론”이라며 뽐내듯 자랑을 했다. 그 시절 날씬한 스포츠카 이름이 티뷰론이었으니까. 또 “할아버지가 둘이다.”라며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듯이 즐거워했는데, “여기 할아버지, 또 광주(廣州) 할아버지.”라는 것을 보면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란 말의 ‘친’과 ‘외’란 접두어를 모르니까, 그냥 ‘할아버지’가 둘이어서 좋다 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정민(외손녀)이는 어휘의 구사력이 너무 뛰어나서 도저히 아이의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히 어른 수준에 가까울 만큼 놀랄 정도여서 내가 참으로 입이 벌어졌다.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일산에 살 때, 다른 또래들 같으면, “함미, 가지 마.”라며 혀짤배기소리를 했을 법한 말을, 제외조모의 팔을 붙잡고 “할머니, 정민이랑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다. 겨우 두돌잡이인 자손의 어디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며, 또 어찌 저렇게 적재적소에 써먹는지 알 길이 없다. 세 살배기 때는 가끔 관용구도 섞어 쓰는 것으로 봐서 나의 어머니인 제 증조모의 어휘력을 그대로 닮은 걸까? 정민이는 또, ‘나’란 말 대신 앞에서처럼 꼭 ‘정민이’라고 제 주장을 폈으니 “나도 줘.”는 “정민이도 줘.”, “나도 따라 갈래.”는 어김없이 “정민이도 따라 갈래.”라고 했다. 또 작은 것을 “눈곱만 하다, 코딱지만 하다.”고 했고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은 엄마.”라는 둥, ‘이 세상에서’ 란 말도 더러 했다. 세상을 제법 아는 것처럼.
부산의 행자(4촌)는 왜놈시대에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어릴 때 색깔을 지칭할 적이면 ‘시론(しろ:白) 거 말고 아깐(あか:赤) 거’를 달라고 했는데, 그건 ‘하얀 것 말고 빨간 것’을 달란 뜻의 일본말이었던 반면, 민아(손녀)는 제 외조모를 지칭할 때 곧잘 “퍼플(purple) 주스 할머니.”라고 해서 보라색 포도 주스를 챙겨 주시던 외할머니가 포도색깔로 연상 되는 모양으로 영어를 섞어 썼다. 세월 따라 일본말이 영어로 바뀐 셈이다.
민준(손자)이가 우리 나이로 10살이 되던 2017년 설날, 가족 모두가 죽 늘어서서 세배를 할 때 느닷없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데요.” 라고 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원 자손도. 아이가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웠나 싶었더니 만화책에서 보았다는 것으로, 자기 나름대로는 미리 준비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제 외가에 세배를 가서도 같은 소릴 하더
란다. 설날 세배를 받는 자리에서 그 말을 듣는 나로서는 ‘그 자손 참 엉뚱하고 엄첩다(장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문에 이상이 있었던 모양으로, 호롱불 시절이라 방이 어두웠던 관계로 성냥불을 또 켜고서 엎드린 내 엉덩이 사이를 들여다본 모양인데, 미처 제대로 다 보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타버린 성냥 대가리가 내 궁둥이 살갗 위에 떨어졌고 아직 덜 식은 그 불똥의 뜨거움에 깜짝 놀라 내지른 소리가 ‘똥뽕 빠진다’였단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 ‘똥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아이들 말에는 엉뚱한 단면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자기 나름의 신조어도 종종 생산해 내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