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고 한 밤일
발가벗고 한 밤일
결국 우리는 안팎의 열기를 견디다 못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처음에 웃옷을, 다음엔 러닝셔츠를, 끝내 바지까지 홀랑 벗고, 홑것 한 가지만 걸친 벌거숭이로 밤일을 하여, 진해 PVC공장 건설은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때 실무진들 사이엔 애사심이니 체면이니 하는 용어가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을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었다. 진해 PVC공장 건설이 본궤도에 올라 일본으로 기술 연수를 받으러 여남은 명의 동료들이 출국하는 뒤치다꺼리를 끝낸 어느 날,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느 마나님은 비만 오면 죽은 영감님 생각이 줄금줄금 난다던데, 나는 문득 ‘열두 냥짜리’ 사내가 한없이 부러워졌다. 비 쏟아지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쉬게 마련인 공사판의 그 사나이가 부러워진 것이다. 하루만, 아니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휴식을 좀 가져봤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그보다 더한 소원이 또 어디 있으랴?
어느 해인들 덥지 않있으랴만 병오·정미(丙午·丁未) 이태는 찌는 듯이 더웠다. 참으로 가물고도 무더운 긴 여름이었다. 소나기도 한 줄금 없이 쨍쨍한 햇볕만 내리쪼이는 찜통 같은 날씨였다.
나에겐 좀 우스운 소원이 생겼다. 덕수궁을 한 바퀴만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 소원이었다. 전찻길만 건너면 대한문인데……. 덕수궁에 가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것이 4년 전이던가? 아마도 5년은 더 넘은 듯했다. 내게 덕수궁에 가야할 특별한 볼일이나, 거기 어떤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한번 휙 돌고 오면 몸과 마음이 가뿐할 것처럼 느껴졌으나, 시간에 쫓겨 전찻길만 건너면 되는 덕수궁에도 못 가보는 주제에, 어찌 잠을 한 숨 더 자기를 바랐으리요. 밤이 되면 서로 잎을 보듬고 잠드는 자귀나무가 부러웠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몇 밤을 새우고 제2 정유공장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는지 모른다. 동양석유공업주식회사(가칭)가 한화에너지(주) 즉 경인에너지주식회사를 낳게 한 뿌리였고, 나아가 한화석유화학과 한화종합화학의 모태였다. 일에 미친 나는 혼신의 힘으로 열중했다. 정부에서 그해 6월 10일까지를 신청서의 마감일로 못 박아 공모를 하고 있었으니, 오줌 누고 뭐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국·영문으로 10여 가지가 넘는 계약서를 작성하랴, 그걸 일일이 공판(孔版) 자타를 친 계약서 교정 보랴(그때는 컴퓨터는 고사하고 워드 프로세서도 없던 시절이었다), 계약서 인쇄하랴, 정부에 신청서 내랴, 다른 회사의 동태도 파악 보고하랴, 속담에 ‘눈이 빠져도 거미라고 떼어버린다’더니, 일속에 묻혀 나를 잊은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