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자식 5
부잣집 자식 5
엉겁결에 해방이 되자 우리가 부른 애국가는 ‘올드랭사인’ 곡에 맞춰져 있었고, 아직까지 ‘대한’이란 말을 쓰기 전이라 마지막 소절은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불렀다. 그리고 갖가지 ‘해방의 노래’가 나와서 배웠는데 이를테면,
‘잊으랴 잊을쏘냐, 해방의 이 날, 삼천만 가슴마다 넘치는 기쁨,
모두 다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이보다도 더 기쁜 날 닥쳐오도록.’
‘아침 해 고울시고 삼천리 동산, 자아유의 종소리 울려오누나,’
‘모여라 동포여 노래 부르자, 나가자 굳세게 새 광명에로.’
또 ‘삼천리강산에 햇빛이 뜨는 날, 우리의 앞길에 무궁화 피었네,’
및 ‘어둡고 괴로워라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 년’ 등으로 시작되는 노래들이었다.
이때까지도 ‘동무’란 말이 흔하게 쓰였는데, 어느 시기부터 암암리에
그만 ‘동무’란 말이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노래 가사에도 있듯이 그때
는 ‘자유’, ‘자유’가 대유행이던 시기였다. 해방이 되자, 모두들 무조건적
인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철도 선로반에서 일하던 우봉 숙부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을 보고 ‘위험하니까 철로로 다니지 말라.’고 하면,
‘내 자유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라며 대들더라고 했다. 자유의 개념이 잡히지 않았고 자유의 의미를 모른 채 한동안 방종으로까지 흘렀다. 뭐든지 제멋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로 알았던 시절이다. 또 운동회 때 ‘청군 홍군’이란 것도 ‘청군 백군’으로 용어가 바뀌어버렸다.
해방이 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누런 설탕이 집집마다 배급으로 나왔
는데, 워낙 배가 고팠던 사람들이 그걸 숟가락으로 얼마나 퍼먹었는지
곳곳에 배탈 난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쌀이나 보리쌀 또는 밀가루를 주지 않고 어쩌자고 설탕을 나눠 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더더구나 시고 달고 향기 나는 도로프스(드롭스: 사탕)도 배급이 나왔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 먹던 도로프스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다. 얼마나 향기가 독특했으면! 나는 그 향기의 드롭스를 다시 찾지 못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