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쇠약으로 울산행
신경쇠약으로 울산행
한국화약(주) 기획과장으로 경인에너지 설립을 서두르고 있을 때 너무도 일에 지친 나머지 심신이 대단히 피곤하여 파김치처럼 퍼질 지경이었다. 나의 차차상급 관리자란 사람은 지나친 권위주의자인데다 약한 자 앞엔 독재자로 군림하는 스타일이고 비인간적이면서 성질도 급해 싫다가 못해 밉다가, 끝내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걸핏하면 퇴근시간 직전에 사무실 요원 몇 십 명을 전원 대기시키는가 하면 매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며 사람이 도무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주) 설립에 따른 미국 유니온 오일(Union Oil of California)과의 합작투자계약서, 정유시설(50,000 배럴/일 Topping Unit)과 324,000KW 민간발전소 건설을 위한 Fluor사와의 건설계약서, 유니온과의 건설관리계약서, 조직 및 운영 관리계약서, 한국전력(주)와의 전력수급 계약서, 연료유공급계약서 및 율도 공동개발 계약서 등등 열댓 가지 계약서를 국영문으로 작성하고 미국 측과 협의하여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그걸 외주를 주어서 공판이란 방식의 등사원지(stencil paper)에다 한 글자씩 또닥또닥 찍는 방법으로 찍어서, 등사기로 인쇄하고 교정을 보는 등의 일은 밤낮없이 태산 같았다.
그때만 해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 성질과 그 몹쓸 인간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인다고 해서 그랑 맞붙어 싸워 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니까 내 속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속으로 미워하다가 차츰 꿈에서까지 싸우기도 하며 저주를 퍼부었는데, 잠꼬대를 심하게 할 때는 옆에서 자는 아내를 주먹으로 가격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는 단 한 번도 반기를 들고 나서지 못한 나라는 위인이고 보니 상급자에게조차 한 번도 항의하거나 대들거나 덤벼보질 못했다. 그냥 속으로만 참는 것이 일이었는데, 그 참는 것이 지나쳐서 병이 되었나 보다. 대신 꿈에 나타난 그 인간에게 맞서 대들기도 하는 일까지 생겨, 마음에 병이 깊어 박종철이란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상담했더니, ‘신경증’이란 진단을 내리면서 한동안 직장을 쉬면서 보기 싫은 상급자를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혼자서만 속을 끓이고 터놓고 말은 못하니 불만이 안으로 차서 어떻게도 처리하지 못하는 내면적 갈등이라고나 할까? 생머리가 아프고 회사에도 가기 싫고 그 인간은 꼴도 보기 싫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정이 있고 나를 공부 시키느라 힘들게 농사를 지은 부모님이 계신데 어쩌겠느냐?
내 생각엔, '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회사가 정지하고 전혀 돌아가지 않을 듯'했지만, 마음의 병이 깊었으니 내 병부터 치유해야 마땅할 판인지라 진단서를 제출하고 한동안 병가(病暇)를 얻어서, 김관일 씨 댁에 와있던 밀양 사람 윤진봉 선생에게 얘기했더니 자기랑 같이 바닷가로 가자면서 울산의 정자동이란 데로 데리고 갔다.
매일처럼 회사에 출근하여 일상에 쪼들리다가 훌훌 털어버리고 넓고 넓은 바다를 보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뭔가 숨이 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가 4월이어서 날씨도 온화하고 바다도 잔잔하였다. 마침 윤 선생이 아는 분 댁에 방을 정하고 무조건 바닷가로 나갔다. 울산 정자동 바다는 내가 부산에 있을 때 보던 바다와 같은 탁 트인 바다여서, 인천에 가서 본 시커먼 갯벌이 깔린 바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았다. 아주 그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