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안 싫으면 됐다

사투리76 2019. 3. 10. 01:34

안 싫으면 됐다

 

우리가 안방에서 나누는 얘기를 장지문 건너에서 처녀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나 나는 처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30분이 넘도록 세상 얘기를 나누다가 드디어 장지문이 열리고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거기에 앉아있었던 처녀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는데 고개를 어찌나 푹 숙이고 앉았는지 보이는 것은 처녀의 콧등 뿐이었다. 고개를 좀 들면 좋으련만. 멋쩍기 한량없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엄숙한 자리라서 긴장도 되었지만, 낯선 남녀가 처음 한 방에 마주 앉아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대뜸 내가 뱉은 첫마디가,

맞선이란 것을 처음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것 참 싱겁고 찜맛없고(멋쩍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처녀도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보더니 알겠어요.”라고 했다. 말하자면 노상안면이 있다는 소린 모양인데 나는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어물어물했는데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설 때에야 비로소 고등학교 2학년인 한 해 동안 통학기차를 타고 다닐 때 자주 본 탐스럽게 예쁘장하고 키가 매우 훤칠하던 단발머리 중학생이 그 큰아기 얼굴에 오버랩 됐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나왔다. 

 

그렇게 싱겁게 맞선이란 걸 보고 나서 이모님 댁에 인사를 갔더니 이모님께서,

어떠하더냐?”고 넌지시 물으시기에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고 여쭈었더니

그러면 됐다. 안 싫으면 됐다.”고 하시어 무슨 소린가했는데 알고 보니, 이모님은 종갓집 큰며느리라서 시동생과 조카들 20여 명의 결혼을 직접 주관해 본 어른이라, 맞선을 본 다음 처녀나 총각이 도무지 아니다, 난 싫다.’며 머리만 흔들지 않으면 주위에서 서둘러서 일을 밀고 나가는 것이 순리요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보자고 다시 처녀 집으로 연락을 보내 이번에는 아예 김대복 씨 댁으로 나와서 처녀와 총각이 단 둘만 만났다. 그렇다 할지라도 뭐 할 얘기가 있어야 얘기를 나누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가 닭 보듯이 앉았을 수도 없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도 싫고. 무료하고 갑갑한 시간이 흐르자 멋쩍기는 어제와 마찬가지였지만 주위에 지켜보는 어른들이 없으니 분위기가 어제와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어색하기는 별차 없었다. 처녀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도 못할 형편이라 하는 수 없이 내가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꺼내다 보니 내게 관심 있는 동물 얘기에 나비 얘기에 곤충 얘기를 이어갔는데 재미없는 얘긴데도 귀를 기울이는 척 해 줘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