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졸업선물 지게 1

사투리76 2019. 2. 14. 00:24

졸업선물 지게 1

 

  초등학교에 입학할 땐 왜놈 시절이라 건천공립국민학교였던 것이 졸업할 땐 대한민국의 건천국민학교로 바뀌어 있었는데, 남자 2학급, 여자 1학급 도합 3학급에 200여 명 가운데 내가 수석으로 졸업을 했는, 아버지의 졸업선물은 당신이 손수 참하게 다듬어 주신 지게였다.

 

  비록 소작이긴 하지만 논농사 13마지기를 아버지 혼자 힘으로 짓자면 버거운 일이었기에 일손도 거들 겸 농사일을 배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기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산에 가서 땔나무도 해 오고 농사 일에 필수품인 지게가 졸업선물로는 제격이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월천 어른의 지론은 사람은 도둑질 아니면 무엇이라도 다 배우라것이었지만 현실이 그렇질 못하니까 그랬겠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전혀 달라 아이가 땔나무나 해다 나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지 아니한 까닭에 중학교에 일단 진학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5년 봄이었는데, 광복이 되고 나자 금방 미국 바람이 불어서 학기 시작이 9월로 바뀌어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것이 19517월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만든 내 지게를 짊어지고 멀리는 집에서 5~6킬로 거리의 물방앗골까지 땔나무를 하러 가서 땔나무 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으며, 가까이는 외꼴이나 집에서 1킬로쯤 떨어진 작은 오갱이로 가서 깔비(솔가리)를 긁어오기도 하고, 새나 키 큰 풀을 베어 넣어 북데기를 긁어 오기도 했다.

 

   땔나무를 하러 가거나 해 올 땐 우리 집이 산 쪽에 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차를 타러 갈 때면 우리 집이 기차역에 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서로 모순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오죽 나뭇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얼마나 그게 무거웠으면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그렇지만 어른들은 내 나뭇짐을 보고 까치집만 하다고 놀려대곤 했다. 요새 신갈 집에서 산책길을 가다 보면 새빨간 깔비(솔가리)가 소복이 쌓인 것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모른다. 가랑잎도 별로 섞이지 아니한 참깔비(참 솔가리)라니! 저걸 긁어다가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피우면 향긋한 솔냄새가 집안 가득히 퍼질 텐데 말이다.

 

  1951년부터 그때까지 6년제이던 중학교의 학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3년제로 나뉘었다. 6-6-4제가 6-3-3-4제로 바뀐 것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중학교는 학교마다 개별적으로 시험을 치른 것이 아니고 국가연합고사인지 일제고사인가를 쳐서 그 성적에 따라 진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방될 때 우리가 국민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우리 동기생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새로운 제도가 적용되곤 했는데,

 

  그 뒤에도 우리 동기생부터 시행된 제도가 여럿 있었다. 그 시절에 국가고사를 실시한 것은 부정입학과 과도한 입시경쟁을 완화시킬 목적이었다지만 어린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도 과외란 것이 있어 중학교에 갈 아이들은 수험공부라고 해서 방과 후에 남아서 따로 공부를 했다. 아직 전쟁 중이었는데 국가에서 실시한 일제고사의 성적이 306(500점 만점)이 나와서 그 정도의 점수면 경주 촌놈이 대구의 경북중학(서울에는 뭐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에도 갈

만한 점수였기에, ‘아이에겐 공부를 시켜야 된다.’고 어머님이 우겨서 중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게 됐다. 하지만 경북중학은커녕 하숙을 해야 하는 경주중학교도 갈 형편이 못되어서 마침 1회 신입생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또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도 있는 무산(茂山)중학교로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