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된 재수생 2
졸지에 된 재수생 2
경주고등학교의 이종용 선생이든, 그 학교 고3 담임선생이든 학교 선생님이라면, 경주공고로 가는 우편물이 잘못 왔다고 주인을 찾아주든가 경주우체국으로 반송을 하든가 해야 마땅한 일이건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만 그게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걸 어쩌나? 대학에 가려다가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졸지에 재수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가 시험도 못 쳐보고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배춘식 친구(경주공고 토목과 출신으로 연세대 의예과에 붙은 동기생)가 좋은 일이 있으니까 무조건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해 와서, 그가 묵고 있던 서울 신촌으로 올라가서 알아봤더니 수도공대(아마도 2차나 3차였던 것 같다)에 들어갈 수 있게 주선을 해 준다는 것이었으나, 서울공대가 아니면 아무 것이든 다 싫다던 나였기에, 고맙지만 사양한다 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나는 국립대학교에 들어가야만 등록금이 싸니까 사립대학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살기 힘든 농부의 아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뿐이었으니까.
그때 배춘식이가 있던 하숙집 방에서는 매캐한 메주 뜨는 냄새가 나 가뜩이나 복잡한 내 머리를 매우 아프게 하였다. 그가 보기엔 내가 참안쓰러웠을지 모르나, 참말로 등록금이 싼 국립 서울공대, 그것도 시험만 친다면 장학생으로 붙을 자신이 넘친다는 엉뚱한 똥고집에 젖어 있던 나에게 수도공대 같은 것은 학교로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서울대학교만 대학교로 보였지 여타의 대학은 대학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돈이 없던 시절이라 장학금만 준다면 어디라도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서 광주의 조선대학교로 가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나로서는 굳이 그런 곳까지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건방이 넘친 나였기에.
주위에서는 아무래도 너무 억울하니까 나를 보고, 정부(체신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겨우 고교 졸업 예정자인 내가 감히 소송을, 그것도 국가를 상대로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젠 결과적으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는데, 속에서는 천불이 끓어오르는 것을 어이하랴?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감히 내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소송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불쌍한 우편배달부 하나에게 징계처분이 내려질 뿐 나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듯하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등기우편물이 잘못 됐을 경우 ‘해당 우편요금이 반환’ 된다나 어쩐다나.
이를 계기로, 나의 또 다른 우편물과의 악연이 시작된 셈이었다. 인생의 고비나 갈림길마다 내가 보낸 전보가 가다가 없어지거나 늦게 가거나 하는 우편물 사고가 줄줄이 나타났으니까. 공교롭게도 인생의 전환점마다에 어김없이 나타나다니? 이건 ‘배달 사고 줄줄이 사탕’ 꼭지를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