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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300개 쌓아놓고 땅굴에서 기다렸다… 그녀(시베리아 야생 암호랑이)가 오기를

사투리76 2011. 9. 17. 08:19

주먹밥 300개 쌓아놓고 땅굴에서 기다렸다…

그녀(시베리아 야생 암호랑이)가 오기를

〈"훅, 후-우욱…." 렌즈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블러디 메리가 냄새를 맡는다. 예민한 포커스를 만지느라 장갑을 벗은 왼쪽 손등 위로 뜨뜻한 콧김이 훅 끼쳐왔다. 등골이 깨질 듯 경직되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콧김과 함께 그녀의 뻣뻣한 수염이 왼쪽 손등을 스쳤다.(…)바로 귓전에서 호랑이의 숨소리가 쏴악 쏴악 들려왔다.〉

숲의 지배자‘왕대’. 숲에서 불쑥 나타난 왕대는 시선만으로 간단히 저자를 제압하고 입술을 한 번 씰룩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 /김영사 제공

'논픽션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저자 박수용(47)씨는 EBS 자연다큐 전문 PD 출신의 콘텐츠 제작자. 1995년부터 야생호랑이를 찾아 러시아 시베리아와 만주, 남한의 백두대간을 누볐다. '야생의 조선곡(朝鮮谷)호랑이' '야생의 시베리아호랑이 생포기' 등 숱한 화제작을 제작한 그가 이 책에선 '블러디 메리'라 불린 야생 암호랑이 3대(代)를 추적해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과정을 재생했다.

1995년부터 호랑이를 쫓아온 저자 박수용씨. /김영사 제공

그의 호랑이에 대한 애정은 신앙 수준이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늘씬한 몸체가 팽팽하게 이어지다 불쑥 튀어나온 견갑골, 그 위로 당당히 치켜든 강인한 얼굴, 정갈한 외모, 정제된 행동, 깨끗한 모습"(251쪽)이라고 감탄한다. 그렇지만 호랑이와의 만남은 기다림과의 싸움. '오늘 안 왔으니까 내일도 안 올 것'과 '오늘 안 왔으니까 내일은 올 수 있다'가 공존하는 확률의 게임이다. "호랑이가 오지 않는 날과 오는 날은 모두 단 하루의 차이다. 이 두 날이 만나는 경계선이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됨을 믿어야 한다."(273쪽) 그래서 나무 위나 땅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렌즈만 밖으로 내놓고 주먹밥 300개와 배터리, 장비를 쌓아놓고 밤에도 눈 감고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하고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엉뚱한 순간에 마주치기도 한다. 어느 날 산길을 걷다 잠시 쉬는 사이 풀숲이 흔들리더니 이마와 목덜미에 '왕(王)'자와 '대(大)'자 무늬가 선명한 숲의 지배자 '왕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호랑이는 저자를 도도하게 노려보다가 입술을 한번 씰룩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갈 길을 간다. 저자는 압도당했다. "나는 갑자기 초라해졌다.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허탈한 기분이랄까?"(324쪽)라며 이렇게 되뇌인다. "호랑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늘 이것이 궁금했다."

고고학자들처럼 땅 위에 난 발자국만으로도 호랑이가 벌인 일을 알아채는 저자는 블러디 메리의 자식과 손자들까지 태어나고 사라져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굶주린 나머지 먹이 다툼을 하던 동생을 물어 죽이고 잡아먹기까지 한 수놈도 있다. 현재 시베리아호랑이는 세계적으로 35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씻지도 소리 내지도 불을 켜지도 못하고 6개월씩 갇혀 지내야 하는 극한 상황이라는 팩트(fact), 군더더기 없이 박진감 넘치는 문장 그리고 "6개월을 잠복하는 땅굴도 원한다면 호텔이 되지만 원하지 않으면 감방이 된다"는 조용한 깨달음이 전편에 흐른다.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김영사|436쪽|1만6000원

김한수 출판 팀장(우리 큰애)

조선일보 201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