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피란길 1

사투리76 2019. 2. 13. 01:47

피란길 1

 

  일본 놈들은 새 학기를 봄에 시작했는데 비해, 해방이 되고부터는 새 학기의 시작이 9월로 바뀌었다. 1950년 어느 날, 우리 마을에도 피란을 가라는 소개(疏開)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어린 생각에 교과서는 꼭 가져가야만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어머니가 준비한 미숫가루와 함께 조그만 륙색 속에다 그걸 챙겨 넣었다. 미숫가루는 그때 처음 먹어봤다. 그 와중에 나주 정 씨 할머니는 피란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한동안 애를 먹었다.

 

  학술 숙부님은 국군에 나가고 없었기에, 나주 정 씨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숙모 그리고 나와 권실이만 피란길에 올랐다. 어머니는 군인(학술 숙부님) 가족의 표시가 분명히 나는 사진들을 모두 독에 넣어 땅에 묻어놓고 피란을 갔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까 습기가 차서 다 못 쓰게 망가져 있었다. 소개령이 내려져서 장승동을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갈 곳이 어디라고 딱히 정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편 따라 간다면 부산까지 내려갈 작정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떠나려니 쌀 몇 말에 이불, 입을 옷 몇 가지 등만 챙기고 모든 가재도구는 그냥 두고 떠나야만 했다. 우리의 피란 짐은 소바리에 싣고 갔다. 피란길에 소를 몰고 가니까 걸음이 느릿느릿할밖에 없었지만 어린 나는 그 느린 소를 따라가는 것도 힘에 벅찼다. 저만치 한 100미터 정도 앞서가는 소바리짐을 아무리 애를 써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어이하리. 내 짧은 다리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방도가 없어 참 안타까웠다. 앞선 사람을 못 따라가던 이 장면만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겨우 륙색 하나만 짊어진 형편인데도 말이다. 오히려 소바리짐과의 거리가 차츰 멀어지기만 했고, 내가 빨리 걸어 보겠답시고 발을 재게 놀려 봤지만 마치 꿈에서처럼 허우적거려질 뿐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했다.

 

  그로써 마라톤 선수들이 출발점에서 뒤처지면 끝끝내 선두그룹을 따라잡지 못하는 속성을 알 것만 같았다. 그때 누이동생 권실이는 5살쯤 되었는데, 아버지가 짊어진 지게 위에 올라앉아 두꺼운 돼지가죽으로 만든 나의 란도셀 가방을 메고 지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까막서리(지게뿔)’를 붙잡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우리는 지금의 신경주역에서 가까운 동네인 고내[花川]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그때 피란처는 주로 인척 관계가 있는 집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나 보다. 안동 고모네는 우리 집으로 오고, 우리는 화천으로 갔으니까. 우선 도착한 곳이 종이모네(최씨) 동리였다. 우리는 외갓집 식구들과 같이 갔지만, 장승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내남면 비지 마을로 피란을 갔다. 우리도 밀리고 밀리면 나중엔 부산과 제주도나 일본으로 가야 한다고들 했다. 혹시라도 피란길에 식구들이 흩어지면 막연하게 일본에 가서 만나자고들 했으니 참으로 막연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닌가 일본이 무슨 조그만 동네 이름도 아니고.

 

  한여름이라 피란 때 가지고 간 묵은쌀로 밥을 지으면 밥에서는 아주 역한 짠내(절은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종이모네 집에 있다가, 거기서 얘길 해 줘서 건넛마을의 어느 집에서 지냈는데, 땔나무가 없어서 종이모부가 손수 자기 집의 땔나무를 거기까지 지게로 져다 줬다. 피란 기간 중에 몹시도 신세를 졌는데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전하고 보답도 못하여 죄스럽다.

 

  그때 종이모네 집에서는 토종벌을 치고 있었는데, 그 피란 와중에도 나는 벌통 앞에 붙어 앉아 벌들이 들락거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내가 벌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몇 시간이고 벌통 앞에 앉아서 벌을 관찰해도 전혀 지루하질 않았다. 벌집에서 나와 휭 날아가는 녀석. 다리에 꽃가루를 묻혀서 돌아오는 녀석 등을 지켜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남들은 아마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