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지원병 1기생-학술 숙부님
해군 지원병 1기생-학술 숙부님
광복 1년 전에 학술 숙부님이 일본 해군에 강제로 끌려갔기에 우리 사립 앞에는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어머님은 아침저녁으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숙부님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곤 했다. 명목은 해군지원병 1기생이지만 사실은 강제징병으로 끌고 가면서 일본 놈들은 교묘하게 명칭을 바꿔 붙여 놓았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숙부님이 진해에서 신병교육을 받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님과 내가 정기적으로 면회를 갔다. 나는 학교엘 다니지 않았으니 아마 일곱 살이었지 싶은데, 군인들과 면회객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라면 일본 군가인 ‘갓때구루조또이사마시꾸’라는 노래를 넉살 좋게 불러 박수를 받기도 했다.
‘갓데 구루조도 이사마시쿠(勝って 來るぞと 勇ましく이기고 돌아오마 라고 용감하게)/찌갓데 쿠니오 대타가라와(誓って 故鄕を 出たからは: 맹세하고 고향을 떠난 이상) [이하 생략]
또 ‘새매루모마모루모구루까내노……’라는 것도 있었다. 즉,
‘마모루모 세메루모 쿠로가네노(守るも攻むるも黑鐵の まもるもせめる
もくろがねの:지키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강철과 같이)로 시작되는 노래
들이었다.
‘애마 진국가’(또는 ‘기병의 노래’), ‘와까이 지시오노 요까렌노(젊고 끓는 피의 요까렌의)’ 로 시작되는 노래, ‘미야꼬도소이노소래아깨데…… ○○○노다까꾸강가야께바’ 라는 노래들도 있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가사의 뜻도 모르지만 7살 때 부르던 노래라 그런지 아직도 뇌리에서 좀 남아 있다. 그렇듯 동요를 부르고 자라야 할 시기에 뜻도 모르는 군가만 부르며 커야 했다. 어릴 때 부르던 일본 동요로 생각나는 것은 1학년 때 배운 ‘모모다로상 모모다로상’ 같은 것이 있다.
일제강점 말기에 ‘갓때구루조또……’라는 노래가 얼마나 유행했으면 어린이들까지 “갓때 구룸마 동태(달구지 바퀴) 누가 돌릿노(돌렸니), 집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돌릿지(돌렸지).”라고 개작 가사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가서 부산 가는 차를 갈아타고 삼랑진을 거쳐 경화동서 내렸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진해로 가는 차를 갈아탄 듯한데, 기억에 남는 것은 대구역에서 구름다리를 걸어 넘던 것과 경화동역 앞에서 먹었던 중국집 우동 맛이다. 어쩌다가 우동을 먹지 않고 지나치게 되면, 왜 그 맛있는 우동을 안 먹고 가느냐며 보챘다는 얘길 어머님께 들은 적이 있다. 내 잊힌 기억 속의 경화동역은 으레 중국집에서 우동을 먹는 장소였던가 보다. 거기가 우리 진해 어른의 고향인 줄은 가맣게 모른 채 말이다.
진해로 면회를 갈 때면, 배고픈 훈련병인 숙부님이 먹을 것을 만들어 갔는데, 훈련 받는 군인이 기간병(基幹兵)에게 들키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엿’이었다. 면회를 가기 전에 어머니는 엿을 고아서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잘라서 콩고물을 묻혀 내가 짊어지는 어린이 가방 속에다 감추었다. 일본 놈들이 아무리 약아도 신병 훈련을 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어린아이 등에 짊어진 가방 속에 먹을 것을 감추어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허점을 찌른 것이었다. 이건 모두 어머니의 아이디어였다.
그때 일본 놈들은 위병소에서 면회 온 사람들의 보따리를 수색해서음식물이 나오면 모조리 압수하던 시절이었다. 엿은 남들이 다 잘 때 입에 넣고 오물오물 하기만 하면 저절로 녹아서 삼킬 수 있으며 영양가도 높지, 무슨 소리가 나길 하나 뭐 남의 눈에 띌 염려가 있길 하나? 고된 훈련을 받는 신병의 배고픔을 달래는 데는 그런 생광이 없었던 듯싶다. 숙부님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배춧국에 들어 있던 배추벌레 한 마리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가래도 요기요 메뚜기도 육물이라’는 속담처럼 배추벌레도 배고픈 훈련병에게는 귀한 단백질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