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호주 이민 친청

사투리76 2019. 3. 16. 00:30

호주 이민 신청 

  

 

1970년 그때, 국내정세는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어, 한창 미국 이민의 붐이 일던 시절이라 미국에 가면 기술계는 월급이 최저 500달러, 많으면 1000달러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원/달러 환율이 300/달러였으니 무려 월 300,000원 꼴에 해당된다.


1970년대 초의 내 월급 액이 백 몇 십 달러로 200달러에도 못 미쳤다. 그래서 주위에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화약에 차장으로 있던 윤용길 씨도 그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호주로 이민 갈 생각을 하고 주한 호주대사관에 가서 호주 이민에 대한 자료(교육제도, 주택제도, 광산형황, 이민제도 등등) 10여 가지를 얻어 와서 열심히 읽어보고 혼자서 이민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호주엔 무한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고 그걸 개발하려면 화약 기술자를 필요로 하며, 나는 인천화약 공장에서 화약 관련 국가기술자격증을 획득했기 때문에 생의(生意)를 내 본 것이다. 나와 아내의 대학 졸업증명서도 떼어다 놓고 여권 신청용 사진도 찍는 등  몇 가지 준비를 나름대로 착실히 하고 있었는데, 한국화약() 기획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이 되면서 나의 노고를 들여서 만들고 설립등기를 한 경인에너지()로 뒤늦게전출 발령이 나고, 경인에너지에서 출퇴근 차량도 지원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맙고 신이 나는지 그만 이민 가는 꿈을 거기서 완전히 접어버렸다.

 

 

나에겐 처음 배정된 승용차이기에 대단히 기뻤다. 처음 타고 온 게 토요일 퇴근길이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입이 헤 벌어졌다. ‘촌놈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게 1970년대 초였으며 아직도 서울 자 4171’을 잊지 못한다. 그로써 나의 비밀번호가 4171이 돼 지금도 쓰고 있다.

 

그때는 사당동의 채석장 옆에서 전기나 수도도 없는 오두막집에서 살았으니 밸런스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고, 버스란 콩나물시루이던 시절이니 좋을 수밖에. 그날 퇴근하는 길로 아내를 싣고서 백화점엘 다녀왔는데, 고급 과일 한 봉지를 운전수에게 고맙다며 안겨 줬다. 사실 고마운 건 회사였는데.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좋았다. 억시기 좋았다. 말도 못하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