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말 하나라도 더 담으려 11년을 꼬박… 사전은 바보들이나 만드는 것”

‘강릉방언 자료사전’ 펴낸
이익섭 전 국립국어원장

입력 2022.06.04 03:00
경기도 용인시 자택 서재에 앉은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출간 직전까지 교열과 수정을 거듭했다. 그래도 빈틈이 보이는 게 사전"이라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언어의 숲은 대삼림(大森林) 같아서, 넓고도 깊어 사람을 자꾸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어요. 강릉 방언은 고향 산천처럼 내겐 너무 익숙한 말인데도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신기하고 풍요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동안 화초밭에서만 꽃을 구경하고 있었구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허황한 일이었는지 깨달았지요.”

국어학계 원로인 이익섭(84)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향 강릉의 방언을 집대성한 ‘강릉 방언 자료 사전’을 펴냈다. 벽돌책 두 권, 총 3004쪽 분량에 표제어 약 2만 단어를 음장(音長·말의 길이)과 성조(聲調·높낮이)까지 수록했다. 2011년부터 강릉 구석구석을 다니며 단어를 채집하기 시작해 11년 만의 결실이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그는 “국어학자로서 내 손으로 강릉 방언의 비밀을 캐고 체계를 세워야겠다는 사명감이 늘 숙제처럼 있었지만, 사전 편찬은 원래 머릿속에 없었다”며 “끝내놓고 보니 끔찍했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산봉우리를 어떻게 올라왔나 하는 심정”이라고 했다.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인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모든 일이 때가 있는 것 같다. 십수 년 전 어떤 분이 강릉 방언 사전을 냈다고 서평을 써달라고 한 게 단초였다. 얼마나 엉뚱한 단어와 설명이 많은지, 이런 것이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걸 방관하면 내 사명을 저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큰 힘에 이끌리듯 떨치고 나섰다.”

-사전 만드는 일은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머리말에 썼던데.

“지금 생각해도 사전을 만드는 일이 학문은 아닌 것 같다. 학문이란 건 지금까지 남이 개척하지 않은 걸 연구해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 것 아닌가. 사전은 독창적인 게 없고, 온갖 걸 잡다하게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도 빈틈이 반드시 생긴다. 그래서 사전 만드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이 있다.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를 봐라. 온갖 고생 끝에 새 사전을 내놨는데 주인공이 TV 보다가 신조어를 보고 놀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애를 써서 만들어도, 또 바뀌는 게 있는 게 말이다. 그러니까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웃음).”

-조사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젊은 시절 현지 조사를 다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돼있더라. 경기도 용인 집에서 강릉까지 운전하고 차에서 내리면 허리가 펴지지 않아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방바닥에 몇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 얘기를 듣는 것도 육체적으로 고역이었다. 3~4일 현장 조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녹음된 것을 노트에 받아 적고 그것을 다시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이 꼬박 한 달 걸린다. 그렇게 정리한 노트가 50권이 넘는다.”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언어의 숲은 대삼림 같아서 사람을 자꾸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다"며 "강릉 방언은 익숙한 고향 말인데도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소설가 이순원의 어머니를 강릉 위촌리에서 만났다. 얼마나 단어가 풍부한지, 이런 분 밑에서 어떻게 소설가가 안 나오겠나 싶을 정도다. 내 고향인 사천면에선 100세 넘는 어르신을 만났는데 말뿐 아니라 풍속, 설화, 민간신앙, 속담 등을 기막히게 얘기해주셨다. 주문진 교항리에선 100세, 90세, 80세 할머니 삼총사를 만났다. 이분들이 다 보배라서, 만나고 돌아올 땐 빨리 단어를 정리하고 싶어 과속하게 된다. 보물 한 보따리 캐서 집으로 올 때, 얼마나 흥분됐는지 모른다.”

 

-주로 70대 이상 어르신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방언학 책에 ‘조사 대상으로 지나친 고령자는 피하라’는 게 있다. 치아가 좋지 않으니 발음이 부정확할 수 있고 기억력도 떨어질 수 있다는 건데, 고령화 시대라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어르신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감재떡’의 재료인 가루를 만들기 위해 감자를 썩히는 과정도 길고 긴 인고(忍苦)의 과정이 있었고, ‘큰떡’은 언제 누구에게 보내기 위해, 무슨 떡들을 어떤 크기, 어떤 배열로 담는지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이 ‘옛날엔 법이 많었어요. 시방 머 법이 있소’였다. 강릉 방언은 지금 큰 격변기를 맞고 있어 어휘는 물론이고 음운 구조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40대만 돼도 ‘ㅐ’와 ‘ㅔ’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ㅚ’를 단모음으로 발음하지 못한다. 이런 변화를 겪지 않은 70대 이상 노년층은 정확히 구별해서 발음한다.”

-강릉 방언의 매력은 뭘까.

“보통 방언집이 나오면 ‘경상남도 방언’ 혹은 ‘전라북도 방언’처럼 도 단위로 나오는데, 강릉은 유독 강릉만의 특징이 강하다. 우리나라 전체를 볼 때 서쪽은 음장이 있는 대신 성조가 없고, 동쪽은 음장은 없고 성조가 있다. 그런데 강릉은 두 가지가 다 있다. 여러 지역의 요소가 고루 섞여서 강릉만의 독특한 특징을 낳았다. 양양 사람이 와서 말하면 1분도 안 돼 강릉 사람 아니라는 게 들통 난다(웃음).”

-표준국어대사전에 틀리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예를 들어 ‘막장’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선 ‘허드레로 먹기 위하여 간단하게 담근 된장. 메주에 볶은 콩가루, 소금, 고춧가루 따위를 넣고 띄워 만든다’고 설명한다. 허술하고 잘못된 설명이다. 막장은 색이 굉장히 까만데 왜 까만지 설명에 없다. 메주를 띄우면 속이 까맣게 뜨는데, 그 까만 부분만 떼서 담근 게 막장이다. 더 단맛이 난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 설명만 보면, 대충 막 만들었다고 이해되지 않나. 막 만든 장이 아니다. 강릉 사람들은 된장보다 막장을 더 높이 취급한다.”

-방언을 무시하거나 사라져야 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투리 하면 괴상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방언은 소중한 언어 자료일 뿐 아니라 표준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규칙도 찾을 수 있다. ‘갖은 고생’이라고 할 때 왜 ‘ㅈ’이 나오는가. ‘갖다’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없다. 그런데 왜 ‘ㅈ’을 살리나, 근거는 뭘까 했는데, 강릉 방언에 ‘갖다’라는 단어가 있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강릉 말엔 ‘퇴내다’는 말이 있다. 횡재했다는 뜻이다. 내가 현장 조사 갈 때 과자를 사 가면 할머니가 손자에게 ‘야, 너 퇴냈구나!’ 한다. 염상섭 소설에도 나오는 단어인데, 국어사전엔 없다. 표준어라는 울타리의 바깥을 알면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가 나타난다.”

그는 “조사를 진행하며 11년이 지나는 사이, 이야기를 들려 주던 분 중 절반 가까이 유명을 달리하셨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자료들이 기록으로 남게 돼 다행”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면서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안간힘을 쏟은 기록들”이라고 했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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