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수덕사





설악산 무산스님.

숭산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미국 출신 현각 스님 등을 제자로 길러낸 대표적 해외 포교의 산증인이었지요. 문제는 다비식 이후. 그날따라 기자는 마감이 늦었습니다. 기자단을 태우고 서울로 올라갈 승합차는 대기중이었지요. 승합차에 올라타기 전, 묘한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수덕사 종무소 앞에 줄지어 선 ‘객승(客僧)’ 행렬이었습니다. 이들이 줄을 서서 종무소 앞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차비(車費)’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종무소 앞을 떠나지 않고 거의 ‘데모’ 수준으로 버텼습니다. 종무소 입장에선 이들이 차비를 받고 줄 끝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요. 여하간 객승들의 소동은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차비 지급 금지’ 결의
객승들의 차비 요구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신도들이 보는 가운데 벌어지기 일쑤였으니까요. 사실 객승들이 ‘노린’ 점도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풍경에 철퇴를 가한 것이 2000년대 초반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장(法長) 스님이었습니다. 당시 조계종은 교구본사주지협의회 차원에서 ‘차비 지급 금지’를 결의했습니다. 악습을 뿌리뽑겠다는 의지였지요.

그러면 ‘객승’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일반적으론 조계종뿐 아니라 다른 불교 종단의 승적(僧籍)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말이 많습니다. 머리는 삭발하고 복장도 회색 승복을 갖췄지만, 진짜 스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이들이 불교계 큰 행사에 나타나는 목적은 행사가 끝난 후 ‘차비’를 챙겨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행사가 미처 끝나기 전에도 요구하곤 하지요. 그래서 규모가 큰 사찰들마다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말이 객승이지, ‘걸승(乞僧)’으로 부르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객승을 반겨 맞은 큰스님이 있었습니다. 3년 전 입적한 설악산 신흥사 조실 무산(霧山) 스님입니다. 시조시인으로도 등단해 속명 ‘오현’으로 더 유명한 스님입니다.

오현 스님은 백담사 만해마을에 주로 머무셨습니다. 그러다 동안거·하안거 결재와 부처님오신날 법회가 있을 때면 신흥사 법회에 가셨지요. 문제는 이른 아침, 오현 스님이 행사 참석을 위해 만해마을을 출발할 때였습니다. 이미 주차장엔 ‘객승’들이 그득합니다. 이윽고 오현 스님이 모습을 드러내면 객승들은 문자 그대로 달려가 스님 앞 아스팔트 바닥에 넙쭉 절을 올립니다. “큰스님~”하면서요. 그러면 스님은 주머니에서 짚이는 대로 차비를 건넸습니다. 주변에서는 “스님이 자꾸 차비를 주시니까 더 몰려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입적 후 신흥사 회주 우송 스님께 들은 이야기는 '차비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오현 스님은 어느날 “객승들과 함께 인도 성지 순례를 가겠다”고 선언했답니다. 모든 비용은 오현 스님이 부담하는 조건으로요. 주변에선 난리가 났지요. “아니, 객승들과 함께 인도 성지 순례를 가시겠다니요. 문제가 생길 게 뻔합니다. 인도 가셨다가 몇 명이라도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가지 마세요.” 제자 스님들 입장에서는 모두가 꺼리는 존재인 객승들을 이끌고 인도 성지 순례를 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됐겠지요. 그러나 오현 스님은 단호했답니다. 객승들에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전세기편까지 알아봤다고 합니다. 실행이 되지 않은 이유는 객승들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막상 오현 스님이 ‘성지 순례 인원을 모아오라’고 하자 실행이 안 됐다는 것이지요. 결국 ‘걸승 인도 순례’는 무산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현 스님의 비범한 결심은 오래도록 회자됐습니다.





2018년 3월 1일 동안거 해제 후 오현 스님(오른쪽)이 자승 스님과 안거 때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오현 스님은 평생 스스로 ‘낙승(落僧)’으로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떨어진[落] 스님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그렇지만 ‘떨어졌다’는 의미가 세속의 ‘낙오’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스님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는 ‘만해축전’, ‘만해대상’을 만들어 교과서 속에서만 살아있던 만해 선생을 현재로 이끌어 냈지요. 만해마을은 가난한 문인들이 돈 걱정 않고 집필활동을 할 수 있는 집필공간으로 제공했습니다. 백담사 아래 용대리 주민들에겐 백담사 셔틀버스 운행권을 넘겨줘 자립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줬지요. 백담사 공양주 보살의 자녀 대학 등록금까지 챙겼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오현 스님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입적 후 차츰 알려졌습니다. 생전엔 만해축전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태도와 닮았지요. 노년엔 1년 중 6개월은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가 칩거하면서 사람을 아예 만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출가한 사람이 속세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준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오현 스님(오른쪽)과 신경림 시인이 백담사 만해마을에 세워진 신 시인의 시비 ‘파장(罷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거목의 그림자는 긴 법이지요. 입적 후에도 오현 스님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흥사는 2019년 속초·고성에 큰 산불이 나자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포기하고 비용 2억여원으로 이재민 돕기에 나섰고, 올해도 장학금 1억 8000만원을 지역 학생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서울 성북구 흥천사 역시 불사에 앞서 지역민을 먼저 챙기며 이젠 서울 도심 사찰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꺼리던 객승들까지 챙기던 오현 스님이 떠난 지 어언 3년이 지났습니다. 오는 5월 23일엔 신흥사에서 3주기 추모다례재가 열립니다. 스님의 사리탑도 세워질 예정입니다. 생전에 본인의 시비(詩碑)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으면 스님은 항상 “씰데없는(쓸데없는) 짓”이라고 하곤 했습니다. 아마 이번에 본인의 사리탑이 봉안된다는 소식엔 “내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라며 빙그레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Posted by 사투리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