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사물극장] [76] 나비 박사 석주명의 '만돌린'
조선일보 2018-12-13 YR4 [A39면]
석주명(1908~1950)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꼽는 '나비 박사'다. 중등 교사라는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동서양의 인문 고전과 숱한 근대 논저를 섭렵하며 에스페란토어 연구, 국학, 제주학의 발전에 힘을 보탰다. 그는 일찍이 자연과학·인문학·사회과학을 잇는 학문 융·복합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는 낙농과 축산으로 나라를 이롭게 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일본 가고시마 농고를 다녔는데, 농고 시절 나비 연구를 시작하고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다. 함흥 영생고보를 거쳐 송도고보 생물 교사로 지내면서 나비 연구를 했다. 금강산과 백두산 등지로 나비 탐사 여행을 다니고, 연구 논문을 쓰느라 새벽 2시 이전에는 잠든 적이 없었다. 그토록 바빴건만 그는 만돌린을 즐겨 연주했다. 숭실학교 선배인 안익태의 영향으로 만돌린과 기타를 배웠다. 송도고보 교사 때 바이올린, 플루트를 하는 동료들과 함께 삼중주단을 꾸리기도 했다.
1942년, 석주명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소속의 '생약연구소' 촉탁 연구원이 되었다. 개마고원과 강원도를 비롯해 전국을 가로세로 누비며 나비 탐사 여행을 하고, 가락지장사·각씨멧노랑나비·모시나비·배추흰나비·상제나비·유리창나비·청띠제비나비·근수리팔랑나비·홍점알락나비·흰줄표범나비 등 248종의 나비 이름을 '조선생물학회'를 통해 등재했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의 요청으로 조선 나비의 총목록을 정리해내며 나비 학자로서 위상을 굳혔다.
석주명은 평생 나비 연구에 촌음을 아껴가며 매진했다. 또한 '제주도 문헌집' 등으로 제주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죽음은 허망하고 갑작스러웠다. 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 회의에 가던 중 서울 충무로에서 신원 미상의 청년에게 피격당해 생을 마쳤다. 나이 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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