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통에서 스카웃 제의

 

 

19631월 한국화약()에 입사할 때 나의 첫 월급이 8,000원이었다. 월급을 타서 명동의 최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양복 값이 2,600원이었으니까 어느 정도인지는 비교가 되지 싶다. 그때 우리 월급이 국내 최고 수준이던 삼성물산과 같았으니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초봉을 받은 셈이었다. 다른 재벌급 회사는 초봉이 5,600원 정도였다. 당시 한국화약은 무명이지만 재계 일류로의 도약을 꿈꾸던 시절이었고 인문계 6, 자연계 6명 신입사원을 공채로 뽑아서 새로운 사업을 펼치려고 바탕을 닦던 시절로 우리는 최고의 대우를 받고 일을 시작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월급이 9,600원으로 무려 20%나 올랐다. 하지만 고향에 비료 값과 영농비를 보내야 하고 동생들 공부시키는 것까지 내가 책임을 지고 보니 도무지 저축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사당동에 살 때니까 아이들은 벌써 셋씩 되는데 비교적 많은 월급을 받아도 살림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유리 집에서 살 때부터 대학에 다니던 성촌(아우)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성촌이는 2번이나 1차 시험에 합격했던 사법 시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어느 날은 울면서 한 번만 더 사법 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통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 당시 형편으로는 도저히 허리를 펼 수 없는 지경이라 애처롭지만 청을 들어 줄 수 있는 사정이 아니라서, 거절했는데 지금도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안쓰럽다. 만약 그 무렵에 사법 시험에 성촌이가 합격했다면 우리 집안 형편도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아주 잘 나가던 서울통상생략해서 서통(瑞通)이란 무역회사에서 현재 받는 월급의 배를 주겠다고 스카우트 제안을 해 와서 나는 매우 솔깃했다. 어쨌거나 내가 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것이 암암리에 알려져 있다는 것 아니냐 말이다. 월급을 배로 준다면 저축도 할 수 있을 테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좋은 옷도 사 입고, 성촌이가 고시공부를 할 수 있게 돌봐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아내와 의논을 하니 월급을 배로 주면 일도 배로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지금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하는데 건강은 어쩌려고 그러느냐?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게 낫다.’는 주장이라 어쩔 수 없이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어쩐지 몹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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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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