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사육 2
그 뒤로 소여물 김치라는 ‘엔실리지’ 통도 무상으로 설치해 줬지만 교육 부족으로 한 번도 엔실리지를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아랫방 앞에 몇 년씩 자리만 차지한 채 방치되었다가 결국 파내서 던져버렸다. 면사무소에서는 산이 헐벗는 것을 막는답시고 부엌아궁이 좁히기를 장려하였다. 그땐 연탄도 나오기 전이라 산의 솔가지나 물거리 등속을 베어다 밥도 짓고 소여물도 끓였는데, 주물로 만든 부엌아궁이 틀이란 건 아이들 장난감으로나 쓸 수 있는 크기라서 보기부터 민망하였다. 그 당시엔 큼지막한 장작을 때서 밥을 짓고, 하다못해 깔비(솔가리)를 때더라도 엄청 많은 양을 집어넣던 시절인데 면에서 무상으로 배급해 준 부엌아궁이 틀은 휘파람을 부는 주둥이 꼴이어서 도무지 뭘 땔 수가 없었다. 아궁이 틀이 적으면 나무를 적게 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때까지의 연료를 때던 습관이란 것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그게 변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을.
책상에 앉아서 떠들기만 바빴지 농민들의 생활습관이나 현실 등은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갖다 안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융통성 없는 공무원들이 문제였다. 부인네들이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도 불땀의 정도가 있고 불을 지피는 가락이 있는 법인데, 아궁이만 작게 한다고 불 때는 습관이 고쳐질 리가 없다. 어림이 소견이지 그래, 콧구멍만 한 아궁이 틀을 달아놓고 아이들 소꿉장난이라도 하란 말인가? 나로서는 두고두고 그때의 그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연탄이 보급되고부터는 저절로 산에 나무가 자라서 산림녹화사업을 별도로 벌이지 않아도 벌거숭이산이 없어져 참으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