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엄동설한을 견디게 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모진 추위가 이어지는 지금은 기억도 아련하지만, 지난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그 여름 어느 날 고교 동창들과 은사(恩師) 두 분을 모신 자리였다. "선생님, 하나도 안 변하셨습니다. 옛날 그대로이시네요." "너희도 그대론데, 뭐" 같은 인사가 오갔다. 음식이 나오기 전, 한문 선생님은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셨다. 긴 직육면체 갑에 담긴 것은 합죽선. 그냥 하나씩 나눠주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전등불에 갑을 이리저리 비춰보셨다. 그러더니 "자 이건 네 거"라며 하나씩 손에 쥐여주셨다. 갑을 받고 이유를 알았다. 선생님은 갑 귀퉁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당신이 부채에 적은 글귀의 앞 대목을 메모해 둔 것이었다. 한 제자에게는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절묘하게 연결해 적은 한시(漢詩)를, 등산을 좋아하는 제자에게는 '경외하며 산을 오르라'는 덕담을 자작(自作) 한시로 적어주셨다. 갑 안엔 무식한 제자들을 위해 각각의 부채에 적은 글귀의 뜻을 해석한 쪽지까지 넣어두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제자들 얼굴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쓰셨을 선생님의 정성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 뜨거운 여름부터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지금까지 그 부채는 그저 '관상용'이다. 영원히 그럴 것 같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표현이 전혀 과장되지 않게 여겨지는 한 해를 보내며 이 합죽선처럼 고이 간직하고픈 '고맙고 따뜻한 말' 몇 마디가 떠올랐다.
연초에 만났던 박희천(90) 목사가 먼저 떠올랐다. 1970년대 후반부터 내수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그는 교인이 결석하면 반드시 월요일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챙기거나, 직접 가정방문을 했다. 장년 신자뿐 아니라 대학생 신자들까지 챙겼다. 그때 자란 대학생들이 지금은 한국 개신교의 중추 역할을 하는 목회자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박 목사는 "담임목사 시절, 교인이 세상을 떠나면 가능한 한 직접 염습(殮襲)을 해 드렸다"고 했다. 인터뷰 당시 곁에 있던 부인은 "그때는 그게 하나도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았다"고 했다. 여성 신자의 경우는 부인이 맡았다는 이야기다. "담임목사로서, 생전에 돌봤던 양(羊)이 마지막 길을 갈 때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말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뙤약볕이 한창이던 7월 말 서울 마장동에선 청각장애인 교인을 위한 성당 기공식이 열렸다. 청각장애인들에겐 60년 숙원 사업이었다. 이 공사를 지휘하는 이는 자신도 청각장애인인 박민서(49) 신부.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미국까지 유학 가서 영어 수화(手話)로 공부하며 역경을 헤쳐왔다. 이 성당 건축을 위해 7년간 국내외 130개 성당을 발로 뛰어 성금을 모았다. 그럼에도 그는 "저는 청각장애인만을 위해 사제가 된 건 아니다. 만인을 위한 사제가 되고 싶다. 전 세계의 어려운 이를 돕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고인 물'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부산 도원사 주지 비구니 만오(79) 스님은 4년간 국내외의 어려운 이웃과 학생들을 돕기 위해 16억원을 내놓은 '기부왕'이다. 그가 머무는 사찰의 단청은 다 벗겨지고, 가재도구도 낡은 것들뿐이었다. 그 덕분에 케냐와 네팔 등엔 우물이 생기고, 학교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그는 "시줏돈이 얼마나 무서운데, 1000원짜리 무게도 천근만근"이라며 "저는 신도님들 정성을 어려운 이들에게 전하는 다리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해를 결산하며 국내 각 종교계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고 비판하는 의견도 꽤 있다. 그러나 올해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소금과 목탁'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애쓴 종교인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이만큼이나마 돌아가는지 모른다. 이런 종교인, 그리고 그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엄동설한을 견디고 새해를 맞을 기운을 차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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