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가르침이다

     

    입력 : 2018.05.02 03:15

    한국 종교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저출산·고령화로 제자리걸음
    어린이집·문화 공간 활용 등 증축보다는 지역 봉사 앞장서야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두두둑." 산양(山羊) 두 마리가 숲속으로 내달렸다. 한가로이 풀을 뜯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었다. 놀라기는 방문객도 마찬가지였다. 천연기념물인 산양을 직접 목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올 3월 말 어느 오후 강원도 인제군 한계사지(寒溪寺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산양들이 떠난 후 둘러본 한계사지는 기가 막힌 입지였다. 정면으론 장수대 너머 계곡엔 아직 얼어 있는 폭포 물줄기가 보였다. 뒤로는 설악 연봉(連峯)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V자(字) 모양으로 푹 파인 계곡에 어찌 이렇게 양지바른 너른 터가 있을까 싶었다. 현재 남아 있는 터만 봐도 과거 이곳에 상당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통일신라 때 양식의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고 주춧돌도 큼직했다. 두툼한 광배(光背)엔 오후 햇살이 비끼며 돋을새김한 작은 불상들이 자태를 드러냈다. 수백 년 전 이 아름다운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그러나 다 옛일, 이젠 산양들의 놀이터가 돼 있었다.

    한계사지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때 뜨거운 신앙심으로 만들어진 종교 시설이 원래 용도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유럽에서 성당, 수도원 건물이 다른 용도로 매각되는 것은 이젠 화제도 되지 않을 정도다.

    20세기 한국의 종교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성장을 했다. 그러나 이제 성장기가 지났다는 점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드물다. 저출산·고령화의 여파는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출가를 독려하는 포스터를 만들 정도로 출가 인구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개신교에선 교회 주일학교가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천주교 역시 주일 미사 참여율이 20% 아래로 내려간 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한국보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먼저 진행된 미국 천주교 신자의 미사 참여율이 여전히 40%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속도다.

    한때 금융회사가 종교계엔 담보 없이도 대출해준다던 시절이 있었다. 예상되는 헌금과 시주 등으로 얼마든지 갚을 수 있던 때였고,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 건축 붐이 일었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기독교회사'에서 "1970~80년대 성장시대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교육관, 기도원, 묘지(墓地)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가운데 기도원은 많은 교회에서 유지하기 버거운 시설이 됐다고 했다. 종교 기관이 무리하게 대형 건물을 짓다가 파산하는 경우도 이미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성장이 멈춘 시대 종교계 풍경이다. 앞으론 건축 비용보다 유지, 관리가 더 큰 문제로 닥칠 수 있다.

    다행스러운 변화도 있다. 조계종은 불사(佛事) 심의 기구를 만들어 개별 사찰의 건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훗날 부담이 될 수 있는 사찰들의 건축 활동을 자체적으로 심의해 조정하겠다는 뜻이다. 경기 성남 선한목자교회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 교회는 계속 교인이 늘어 주차 문제가 심각했다. 주차장을 확장하기로 하고 행정 당국의 허가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주차장 증설을 포기하고 새 교인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성남 지역에서 독거노인, 어린이도서관, 노숙인 등을 돕는 작은 교회들의 사역을 지원하기로 했다. 건물 증축 대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를 택한 것이다.

    종교계는 이제 무리한 건축 자제(自制)를 넘어 기존 시설을 지역사회에 적극 개방해야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조명, 음향 장비가 잘 갖춰진 공간은 주민들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제공할 수 있다. 도심에 위치했다면 어린이집, 유치원 등도 가능하다. 지역사회가 절실해하는 일을 솔선수범한다면, 종교계를 보는 주민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법문, 설교, 강론을 찾아다닌다. 그들이 찾는 것은 건물의 위용(威容)이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말씀 곧 가르침이며, 신앙과 생활의 일치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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