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에서 어린 시절 3
외딴집에 살며 동생도 없이, 항상 외톨이로 혼자서 노는 데 익숙해 있었고, 그래도 심심하면 차깃단지(쌀독)에 가서 생쌀을 한 움큼씩 집어먹곤 했다. ‘생쌀 먹으면 엄마 죽는다’는 말이 있었지만 군것질할 것이 없으니 생쌀이나 집어먹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2 단짜리 농 위에 있던 꿀 종지를 내려 가지고 아주 살살 아주 조금만 혀끝으로 핥아 먹기도 했다. 내가 군것질할 것이라곤 떨어진 감을 뜨물에 하룻밤 삭힌 것과 붉은 밀기울을 밥 위에 쪄서 만든 개떡만 있었다. 그러자니 어린아이답게 혀짤배기소리도 못해 보고 어리광을 피울 수도 없었으며 먹을 것을 사 달라거나 떼를 쓰는 일은 더더욱 해보지를 못했다.
세 살배기 때의 민준(손자)이도, 제 마음대로 방마다 돌아다니며 저지레를 하고 있을뿐더러, 미운 일곱 살이라고 해서 한창 어른들이 시키는 말을 듣지 않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인데, 큰외숙모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전혀 그런 말썽을 피우지도 않고 뭐든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는, 매우 늘품성 없는 어린이였던가 보다. 사람에게 있어 늘품성은 대단히 중요한 품성인데 말이다.
해방이 되기 전에는 농사를 지어봤자 별 소득이 없었다. 일본 놈들이
공출로 다 거둬 가버리니까 식량이랄 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어른들은 만주 흑룡강 성에 먼저 가 있던 큰아버지(복문)와 고모님(사숙)께로 갈 수밖에 없었다. 월천 어른을 비롯해 우봉 숙부, 학술 숙부 그리고 할머니 나주 정 씨까지도 만주로 가서 이태동안 농사를 짓고, 장승동 집에는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이던 내가 어머님과 단 둘이서 차례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며 굶어죽지 않고 연명하면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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