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머리 _

내 고향에선 삼복이면 황물을 먹으러 갔다.황물이란 유황 성분을 함유한 떫디떫은 약수로 위장병에 좋다고 했다.이 물은 영천(永川) 정점이란 곳에서 솟는데 황물탕에 가자면 인내산열두굽이 재를 넘어야 한다. 그 고개를 넘자면 모양이 각각 다른 굽잇길을 돌아야 하듯이, 사람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할 듯싶다.

우리 동접들은 일제시대와 6·25전쟁, 4·195·16이란 격랑의 굽이를 돌았고 산업화의 길을 닦는 동안 힘겨운 청춘의 굽이들도 돌아 나왔다.쌀밥 먹는 게 소원이던 시절에 돼지 먹이로 줄 음식찌꺼기를 손수레로 실어 나르기도 했으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가치관의 전도가 심각했으니 내가 지나온 굽이도 열두 굽이 재와 맞먹을 듯싶으며, 그 시절에 불렀던 노래가 열두 냥짜리 인생이다.

소 팔고 논 팔아 공부해서, ‘한국화약(한화)’ 입사 첫날 영문 자료를 12번씩 읽으라는 지시를 받고 좀 깎자고 덤볐다가 직속상사의 미움을 샀으며, 불같은 성질머리를 지닌 차차상급자의 등살을 견디지 못하여 신경쇠약으로 나가떨어졌는가 하면, 사는 게 힘겨워 이민(移民)의 꿈도 꾸어봤고, 결국 한미 합작회사에서 한때 친미파로 찍히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18개월 동안 토·일요일은 물론 하루의 휴식도 없이 발가벗고 일해 봤고 외국에서 배꼽 달린 냉장고를 열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하였다.

한편, 아내와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비롯해 몽골과 중국, 터키, 동남아는 물론 북미와 호주를 유람할 땐 참으로 좋았다. 특히 아이들이 효도관광으로 보내준 일본 크루즈 여행은 신나고 아름다운 추억이다.경인에너지에서 원유(原油) 구매 담당자였던 관계로 석유파동 때는 원유를 구할 일념에 열대지방으로 무람없이 돌아다니다가 요도결석으로 옆구리를 칼로 째야 했고, 상무이사(常務理事) 시절엔 또 원유 덕택에 연간 7,000억 원의 예산을 내손으로 집행했으니 회사 돈일망정 돈은 참 원 없이 써본 셈이다. 그 시절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생각인데흥진비래(興盡悲來)랄까 고작 16개월 만에 종지부가 찍히고 말았지만.

나는 경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워 준 경주에서 문화인 상을 받았는데, 첫째가 정만서설화를 모은 책이고, 둘째가 동경이복원 사업에 불씨를 지핀 것이며 셋째가 경주 지역어 대사전집필에 힘입었다.

내 필생의 사업인 대사전을 엮기 위해 ‘80 평생의 반()’을 바친 것이 나에겐 보람찬 일이다. 경주를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 한국어 연구에티끌만큼의 보탬이 된다면 그런 생광이 없으련만.

나는 아침마다 보고만 있어도 편안해지는 숲속의 화원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있기에, 아직도 EBSBBC 등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마냥 즐겁게 빠져든다. 국립생태원이나 한택식물원, 제주의 생각하는 정원등을 가꾸는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임은 물론, 지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벌판에다 대학교와 더불어 경주지역어 연구소를 짓는 백일몽까지 꾸고 있다.

아주 고지식한 사내가 맨주먹으로 서울 와서 치열하게 살아온 한편, 나름대로 삶을 즐겨 보기도 한 열두 굽이의 사연을 한 굽이씩 펼쳐 본다. 써놓고 보니 내 살아온 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동식물 얘기가 더 많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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