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선물 2
무산중학은 1951년 9월에 설립되었으니 우리가 1회 입학생이 된 셈이었지만 기존의 건천중학교 학생들이 새로 생긴 무산중학교로 편입했기 때문에 졸업으로 치면 우리가 3회 차례가 되었다. 입학을 하고 보니 현곡 출신 아이가 1등이고 내 성적은 2등이었다. 새로 설립된 무산중학교의 교장선생은 경주중학교의 교장과 경주 군수까지를 지낸 이상문 선생이었고 재단이사장은 손경발 씨였다.
9월 들어 첫 등교일이 되었는데 내겐 교복이 없어서 큰 낭패였다. 그때 중학생에겐 교복이란 것이 있긴 했지만 워낙 전쟁 중이라 모두가 힘들었기에, 필수로 사서 입을 형편이 아니라서, 있으면 입고 없으면 무명베옷일망정 아무것이나 입고 다닐 수도 있었다.
우리 집은 교복을 살 형편이 아니었다. 마을에 건천중학에 다니다 무산중학으로 편입한 친구가 있었기에, 지금은 작아서 못 입는 그의 옷을 얻어 입으면 되겠는데 마음은 꿀떡(굴뚝) 같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아 그 친구네 집 앞을 서너 번씩 왔다 갔다 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용을 써 봤지만 끝내 말도 한 번 못 붙여 보았다. 결국 옥양목 베로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준 초등학교 때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등교를 했고, 모표도 살 돈이 없어, 노란 바가지가 깨진 조각에다 잉크로 그려서 실로
꿰매어 달고 다녔다. 그때는 나만 교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러더러 교복이 없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참고 견딜만하였다. 겨울이 될 때까지도 교복이 없어 구호물자로 나온 무슨 여자 옷을 어머니가 손수 학생복 풍의 ‘쯔메에리’로 개조해 준 걸 교복 대신 입고 다녔다. 학교에서도 교복 안 입은 걸 눈감아 주고, 어쩌다가는 슬며시 구호물자 옷이 교복으로는 좀 그렇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지만 뭐 별수가 있어야지, 그냥저냥 그해 겨울 내내 입고 다녀야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구호물자로 나온 여자 옷일망정 검게 물이라도 들였으면 그런 대로 보기가 괜찮았으련만 카키색인 그대로 입고 다녔으니 남들이 보기에도 무엇했을 터이지만 어쩌랴!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것은 그 옷이 양모가 섞인 것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좀약인 나프탈렌이 잔뜩 배여 있어 비만 오면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생머리가 아파 오곤 했다. 그때만 하여도 만년필과 손목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혹시라도 사진을 찍을 일이 생기면, 친구한테 빌린 만년필 뚜껑만을 왼쪽 윗주머니에 꽂고는 만년필인양 뽐내곤 했다. 마치 점잖은 신사분이 행커치프를 왼쪽 윗주머니에다 꽂는 것처럼 말이다. 매우 없이 살아도 겉멋은 피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학생 때 내가 그 지독한 나프탈렌 냄새에 진저리를 친 적이 있어 나프탈렌에 대한 나의 반응은 대단히 민감하고 나쁜 기억인데, 공교롭게도 인천 화약공장에 다닐 때 나프탈렌이 승화해서 잔뜩 스며든 밀가루로 만든 국수와 수제비를 한 여름 내내 먹게 될 줄이야? 기분 나쁜 기억은 겹쳐져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화약 원료로 쓰이는 나프탈렌을 실은 화물트럭에 공장 직원합숙에서 먹을 식품과 밀가루포대를 함께 싣고 온 모양인데, 실려 오는 동안에 승화된 나프탈렌이 밀가루로 옮겨오는 바람에 밀가루가 온통 나프탈렌으로 오염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승화하여 밀가루를 오염시킬 줄을, 그 시절 식당 담당자가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을까 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