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야기] 박완서 소설과 슈베르트 가곡의 보리수… 同名異木

조선일보

     

    입력 2019.07.02 03:15

    빨간 열매 토종 보리수나무, 씨앗이 보리 같다고 붙인 이름
    부처님 성불했다는 인도보리수, 獨 가곡 린덴바움도 '보리수'
    도입·번역 때 잘못으로 혼란… 바른 이름 붙이기가 사랑의 시작

    김민철 선임기자

    서울 몽마르뜨공원 나무들에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탱글탱글 붉은색으로 익은 것이 먹음직스럽다. 떫으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먹을 만하다. "보리수 열매다"라며 따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확히는 뜰보리수 열매다. 보리수나무는 야생이라 주로 산에서 볼 수 있고, 뜰보리수는 일본 원산으로 화단 등 민가 주변에 많이 심어놓았다. 보리수나무 열매는 9~10월에 익기 때문에 요즘 볼 수 있는 붉은 열매는 뜰보리수 열매다. 붉은 열매에 은빛 점이 박혀 있는 보리수나무 열매는 팥알만 하지만 뜰보리수 열매는 1.5㎝ 정도로 더 크다. 둘 다 황백색 꽃이 피지만 아무래도 꽃이 필 때보다 열매가 익을 때 더 존재감이 있다.

    보리수나무와 뜰보리수를 구분하는 것도 헷갈리는데, 우리 주변에는 흔히 '보리수'라고 부르는 나무들이 더 있다. 부처님이 그 아래에서 성불했다는 보리수, 독일 가곡에 나오는 보리수가 그것이다. 제주도와 남쪽 섬에서 볼 수 있는 상록수 보리밥나무 등은 일단 논외로 쳐도 그렇다.

    박완서가 첫사랑을 그린 자전적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도 주인공은 이 세 가지 나무 이름을 헷갈리고 있다. 이 소설은 50여년 전 찬란한 한때를 보낸 그 남자네 집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남자네 집을 찾은 결정적인 물증이 보리수였다. 그 남자네 집은 홍예문이 달린 널찍한 기와집이었는데, 마당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가 있었고 그중에 보리수도 있었다. 주인공은 그 집을 찾아가 '이파리 사이로 삐죽삐죽한 잔 가장귀엔 서너 개씩 빨간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보리수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이 나무들은 얼마나 있어야 그 밑에서 단꿈을 꿀만큼 자랄까. 한 오십 년쯤. 나는 보리수나무가 세월을 거꾸로 먹어 오십 년 전엔 그 무성한 그늘에서 관옥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단꿈을 꾼 것 같은 착란에 빠졌다.'

    /일러스트=이철원

    빨간 열매가 달리는 보리수, 부처가 성불했다는 보리수, 슈베르트 가곡에 나오는 보리수는 각각 다른 나무다. 우리나라에 토종 '보리수나무'가 있다. 보리수나무는 봄에 황백색 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약간 떫은 듯한 단맛이 나는 작고 빨간 열매를 맺는다. 어릴 때 '포리똥'이라 부르며 따먹은 추억의 열매다. 보리수나무라는 이름은 씨의 모양이 보리 같다고 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말 씨를 모아놓으면 보리 씨앗처럼 생겼다.

    다음으로 부처님이 그 아래에서 성불한 보리수는 뽕나무과의 상록활엽수로, '인도보리수'라고 부른다. 고무나무같이 잎이 두껍고 넓으며 인도처럼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열대성 나무다. 30~40m까지 자라는 큰 상록수다. 중국을 거쳐 불교가 들어올 때 '깨달음의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를 음역해 보리수라고 부르면서 보리수나무와 혼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월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립수목원 등 몇 군데 식물원이나 수목원 온실에서나 볼 수 있다. 절에서는 대신 이 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보리자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오거나,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찰피나무를 인도보리수 대용으로 심었다. 절에 가면 꽃자루에 긴 프로펠러 같은 포(잎이 모양을 바꾼 기관)가 달린 이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보리수나무 열매(왼쪽), 뜰보리수 열매

    여기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운데, 슈베르트의 가곡에 나오는 '린덴바움(Lindenbaum)'이 보리자나무·찰피나무와 비슷하다고 누군가가 '보리수'라고 번역해 버렸다. 학창 시절 배운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는 '유럽피나무'라고 하는 종이다. 베를린에 갔을 때 이 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를 본 기억이 있다. 이렇게 해서 인도와 유럽의 전혀 다른 두 나무가 우리나라에서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만났다. 그나마 빨간 열매가 열리는 것은 보리수나무와 뜰보리수로, 부처의 보리수는 인도보리수로 나누어 불러 혼란을 줄이고 있다.

    같은 나무를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만 여러 나무를 한 이름으로, 그것도 수십 년 동안 고쳐지지 않고 부르는 일은 드문 일이다. 잘못 붙인 이름 하나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이름 붙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어디 나무 이름뿐이겠는가. 식물이든 역사적인 일이든 그 특징에 맞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인도보리수(왼쪽), 린덴바움(유럽피나무)

    Posted by 사투리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