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밀려드는 수수꽃다리 향기

입력 2019.05.07 03:14

수수꽃다리는 토종 라일락… 라일락보다 잎 둥글고 꽃 길어
우리 것 개량한 미스김라일락, 로열티 주고 70년대 역수입

 

김민철 선임기자

 

'4월 파일이 며칠 안 남은 용수산은 한때 온 산을 새빨갛게 물들였던 진달래가 지고 바야흐로 잎이 피어날 시기였다. 그러나 수수꽃다리는 꽃이 한창이어서 그 향기가 숨이 막히게 짙었다.'

박완서 장편 '미망' 도입부에 나오는 문장이다. 19세기 중반부터 6·25 즈음까지 개성의 한 거상 일가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주인공 태임이 할아버지 전처만과 함께 개성 용수산을 넘을 때 나오는 장면이다. 초파일을 앞두고 있다면 봄이 무르익은 딱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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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라일락이 만개한 계절이다. 라일락이 피면 근처만 지나가도 알 수 있다. 라일락만큼 향기가 진한 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향기' 하면 떠오르는 꽃이 라일락이다. 현인의 번안곡 '베사메무쵸'에 나오는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중 리라꽃은 라일락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그런데 박완서 소설에 나오는 꽃은 라일락이 아니라 수수꽃다리다. 수수꽃다리는 토종 라일락이라고 할 수 있다. 황해도, 평안남도, 함경남도의 석회암 지대에서 자생하기 때문에 지금은 자생지에서 볼 수 없지만 분단 이전에 옮겨 심은 것들이 자손을 퍼트려 전국 수목원 등에서 볼 수 있다. 지난주 서울 홍릉수목원에서도 향기 그윽한 수수꽃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소설 속 수수꽃다리가 특히 반가운 것은 소설 배경이 황해도와 가까운 개성이라 자생지 수수꽃다리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일러스트=이철원

 

수수꽃다리는 라일락과 비슷하지만 잎과 꽃 모양이 약간 다르다고 한다. 라일락은 잎이 폭에 비해 긴 편인데, 수수꽃다리는 길이와 폭이 비슷하다. 화관통 길이도 라일락은 짧은 편이지만 수수꽃다리는 1.5㎝ 이상으로 길다. 홍릉수목원 수수꽃다리는 화관통이 중지 첫째 마디만큼 길었다. 꽃피는 시기는 수수꽃다리가 좀 빨라 서울에선 이미 지는 중이다. 수수꽃다리와 비슷한 토종 형제나무로 꽃이 흰색이고 수술이 밖으로 나온 개회나무, 잎 뒷면 주맥에 털이 많은 털개회나무(정향나무), 묵은 가지가 아닌 새 가지에서 꽃대가 나오는 꽃개회나무 등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토종 라일락 구분에 애를 먹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꽃과 향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라일락·수수꽃다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꽃인 만큼 이야깃거리도 많다. 라일락 꽃잎은 네 개로 갈라지는데, 다섯 개로 갈라진 꽃을 보면 사랑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어서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다. 네잎 클로버와 비슷한 속설이다. 라일락의 하트 모양 잎을 깨물면 첫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잎을 따 깨물면 당연히 쓰디쓴 맛이다.

수수꽃다리, 라일락

 

라일락 중에서 1m 정도의 수형(樹形)에다 진한 향기를 지녀 조경용으로 인기인 나무가 있다. 미스김라일락인데, 1947년 미군정청 소속의 식물채집가 엘윈 미더(Meader)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털개회나무 씨를 채집해 가져가 개량한 품종이다. 그는 1954년 이를 조경수로 내놓을 때 당시 자료 정리를 도운 한국인 타이피스트 성을 따 이름을 지었다. 이 나무는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도 역수입했다. 우리에게 토종 털개회나무가 있는데도 미국에서 개량한 미스김라일락을 로열티를 주고 도입하는 것이다.

이 사연 때문에 인생 행로를 바꾼 사람이 있다. 김판수 정향나무농장 대표는 기자 시절 이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하다 2007년 귀농해 정향나무·수수꽃다리 등 토종 라일락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그의 충북 단양 소백산 기슭 농장엔 수수꽃다리 등 토종 라일락 3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대량 증식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얼마 전 북한산의 한 절에 있는 나무가 라일락인지 수수꽃다리인지 확인하러 갔다. 스님이 지나가면서 "절에 왔으면 부처님부터 봬야지 왜 라일락 나 무만 쳐다보시오"라고 했다. 그는 속으로 '지금 내게는 이 나무가 부처님이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토종 라일락을 널리 확산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김 대표는 "토종 라일락이 서양 라일락을 대신해 관광지, 식물 관찰 학습지, 힐링 공간 조성에 폭넓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져 곳곳에서 토종 라일락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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