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자식 4

회고록 2019. 2. 11. 07:44

부잣집 자식 4

 

   그런데 란도셀이라는 돼지가죽으로 만든 저학년 학생용 가방이 특별 배급으로 나왔던 모양인데, 큰 외숙부께서 받은 걸 나한테 주셨다.

동무들은 다들 책보란 보자기에 책을 싸서 옆구리에 끼거나 등에 메고 뛰어다니며 필통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나만은 근사한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갔으니 동네 아이들의 부러움이 적지 않아 김주석이는 부잣집 자식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해군의 정모(正帽)에는 어느 나라든 챙이 없고 하얀 카버가 씌워져 있다. 숙부님이 귀향하면서 가져온 해군 정모의 하얀 카버를 벗겨, 어머니가 솜씨 좋게 줄이고 고쳐서 까만 내 학생모 위에다 덮어씌워 주었으니 그걸 쓰고 다니던 내가 아마도 귀공자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6년 내내 나는 부자는커녕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밖에 아니 되는 농부의 아들이면서도 부잣집 자식이란 소리를 간혹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내복이란 것을 구경도 못하고 홑 껍질 무명베 바지를 두 개씩 껴입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 유명한 영천 바람이 사돈하자고 해도 안 한다건천분지의 모진 서북풍을 안고 하교하는 길은 지옥의 행렬이었다. 혹시라도 어떤 어른이 앞서가면 어린 우리는 그 뒤에 줄지어서 마치 기러기처럼 한 줄로 늘어서서 뒤따라가곤 했다. 그러다가 종동댁 방앗간과 용다리 거리에서 한참 언덕 아래에 바람이 덜 부는 바람어지에서 쉬어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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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본식 이름은 가내자와 슈우새키(金澤珠石)’였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것이 어느 부문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더욱 또렷하게 남는 것이 있는 모양으로,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한 성인 하야시(), 야나기(), 호시모토(星本=姨母家), 마쯔야마(松山=外家) 등등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때 하얀 백지에 새겨진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해방이 되고 맨 처음 접한 영어가 올개 상추 벨맛 없다(올해 상추 별맛 없다)’였다. 이게 무슨 소린고 하니, OK, Thank you, very much.였던 거지. 영어에 걸맞은 우리말을 갖다 붙이다 보니 그렇게 바뀐 것이다. 학술 숙부님 단짝인 정원석 씨는 영어를 할 줄 안다고 자랑을 하면서 노온툴룸에 차알람이 카안타고 했었다. 그건 논두렁에 사람이 간다는 소리를 고친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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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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