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자식 3

회고록 2019. 2. 11. 02:15

부잣집 자식 3

 

  해방이 되긴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쌀값은 장날마다 뛰었고 모든 물가가 천정부지로 매년 수십 배씩 뛰어올라 갔으며 공출이 없어진 대신 배급이 끊어지고 보니 먹는 것이 부실하기는 해방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야매라고 해서 비밀리에 거래되던 쌀이 있긴 했는데, 돈이 있어야 사다 먹지. 해방되기 전에는 일본 놈들이 자기네 점령지인 만주에서 가져온, 콩깻묵[大豆粕]을 배급으로 줬는데, 그걸 먹고 어떻게 연명을 했는지 모르겠다. 콩깻묵은 거름으로나 쓰는 물건인데 말이다. 나도 콩깻묵을 배급 받았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 잘난 콩깻묵을 배급으로 나눠 주면서도 일본 놈들은 황국신민 서사라고 하는 걸 외우게 했다. ‘와레라와 고오고꾸 심민나리 쥬우세이못데궁고구니호오젱로 시작되는 것으로,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식으로 나가는 거다.

 

  그때는 버스가 없었고 기차가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는데 기차표를 살 때도 이걸 외워야만 기차표를 살 수 있었으니 촌부들이 그 어려운 걸 외울 재간이 어디 있나? 그냥 나오는 대로, ‘와래와래와 고고꾸신민노지까다비 십칠 문 내 발에 딱 맞고, 어쩌고저쩌고했다.

 

  물자 부족은 더욱 심해서 종이가 모자랐다. 지독한 구두쇠를 보고 짚신도 뒤집어 신는다했는데, 구두쇠가 아니더라도 별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디서 편지가 오면 그 봉투에 물을 발라 떼어낸 다음 뒤집어서 도로 풀을 붙여 회신용 봉투로 썼다. 그땐 그런 것들이 매우 당연한 노릇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어 대신 조선어를 전교생이 모두들 같이 배웠는데, 교과서란 것이 첫 장에 , , , 사람, 이마, 다리라는 말이 그림과 함께 실린 책이었던 바, 그 책 하나로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모든 학생이 한글을 속성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글은 누구나 배우기 쉬운 글이었다.

 

  해방이 되기 전에 황해도까지 가서 교편을 잡고 있던 큰 외숙부께서, 일본인 교장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며 대판으로 싸운 다음 모든 걸 집어치우고 경주로 귀향을 했는데, 해방이 되고 보니 일본인 선생들은 다 돌아가고 없어 어디에서건 교육계에 몸담았던 분이면 해방된 조국을 위해서 취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외숙부도 건천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처숙부인 이영곤 선생, 장승마을 사람인 김영권 선생도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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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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