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여자가 설거지 할 때,

스파르타 여자는 근육을 키웠다

남자 일곱살이 되면 전사 양성기관 보내
가사는 노예에 맡기고 여성들은 체력 단련
오만할 정도의 용맹성, 그리스 제패 신화 이뤄

스파르타는 이 책 덕분에 역사적 억울함을 꽤 풀 수 있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를 꺾고 고대 그리스를 지배한 스파르타는 마치 역사 발전의 발목을 잡은 나라처럼 여겨지곤 했다. 아테네가 문예·합리·선진이라면 스파르타는 무(武)·전근대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아테네는 빛, 스파르타는 음산한 어둠의 이미지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용어조차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지만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스파르타사 권위자인 저자는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은 스파르타에 상당 부분을 빚지고 있다. 그것도 서구의 스파르타 문화 계승자들이 오늘날 기꺼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36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보이는 스파르타의 역사를 투키디데스·헤로도투스·크세노폰·호메로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다양한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복원하고 있다.

◆"성벽 쌓기는 나약함의 상징"

도리스인들의 부족국가였던 스파르타는 전설적(실제로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입법가 리쿠르고스가 기원전 6세기 무렵에 만든 틀에 의해 전투국가로 거듭났다. 그 틀은 아고게(agoge)라는 교육기관으로 시작된다. 아들이 일곱 살이 돼 아고게에 입학하면 개인적 혈연은 끊고 모든 스파르타인을 부모로 삼도록 하면서 전사로 길러진다. 20세가 되면 '공동식사'에 참여한다. 저녁에 열리는 공동식사장으로 가는 길엔 횃불을 켜지 않았다. 스파르타 시민이라면 언제나 은밀하게 이동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한 조치였다.(68쪽) 음주도 경멸했다. 고대 그리스 국가 중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지 않은 것은 스파르타뿐이었다. 술은 정복지의 주민인 노예(헤일로타이)에게나 줬다.(104~105쪽)

스파르타인들의 사냥 모습. 스파르타인들은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공동 식사’에 빠질 수 있는 정당한 사유로 종교의식과 사냥만 허용했다. /어크로스 제공

이렇게 길러진 스파르타 전사들은 오만할 정도로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성벽을 쌓지 않았다. 나약함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51쪽)이다. 테게아라는 나라를 침략할 때는 승리를 전제로 땅 분배를 위한 측량 막대기, 노예들에게 채울 족쇄까지 가지고 갔다.(81쪽) 기원전 545년 아르고스라는 나라와 벌인 전투는 특이하다. 양측에서 300명씩 뽑아서 대결했다. 결과는 아르고스 2명, 스파르타 1명이 생존했다. 당연히 아르고스 전사들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스파르타 전사는 "마지막까지 전장에서 이탈하지 않은 것은 나"라며 자신의 승리를 우겼다. 결국 양국의 전 병력이 동원된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대승을 거뒀다.

전쟁을 결정할 때의 방식도 스파르타인들답다.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행정관이 물으면 큰 소리로 '예(전쟁)' '아니오(평화)'를 외치고 목소리가 큰 쪽이 이겼다. 그래도 판결이 나지 않으면 기립(起立)했다. 누가 겁쟁이로 보이길 바랄까? 아테네와 벌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책에선 '아테나이 전쟁'으로 부른다)이 이렇게 시작됐다.(184쪽) 스파르타인들이 크게 의지한 것은 신탁(神託). 아폴론을 섬겼던 그들은 전쟁을 벌일 때도 신탁에 의지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전쟁이) 적절하다'는 답이 나올 때까지 4번이나 제물을 바치며 거듭하기도 했다.

◆'허벅지 노출광' 스파르타 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스파르타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에 많은 일들이 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194쪽)고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여자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말은 '질서가 없다'와 동의어였다. 실제로 스파르타 여성들은 "우리는 (진정한) 남자를 낳는 유일한 여자"(188쪽)라고 자부했다. 그들은 남자 후견인 없이도 토지를 포함한 재산을 소유·관리했으며 남편 이외의 어떤 남성과 성관계를 가져도 처벌받지 않았다. 가사 노동과 수유까지 노예들에 맡긴 그들은 공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최고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운동을 했다. 직물을 짜고 음식 만들고 아이 돌보고 집안 살림 꾸리는 아테네 여성의 처지와는 천지차이였다. 기원전 396년엔 왕의 여동생이던 키니스키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경기에서 마차경주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스파르타 외의 그리스 지역에선 볼 수 없는 활동성 때문에 그들은 '허벅지 노출광'이란 별명도 얻었다. 강인한 정신력까지 남성에 못지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유명한 용사가 전사한 후 어머니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이보시오, 내 아들이 뛰어나고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파르타에는 내 아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오."(206쪽)

◆신화와 전설

상무(尙武)정신과 검약함으로 고대 그리스를 제패했지만 스파르타 역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몰락의 길을 걷는다. 쇠퇴의 원인은 역시 내부에 있었다. '호모이오이(동등자들)' 사이의 토지(재산)분배 원칙이 깨지면서 불평등과 부패가 싹텄다. 성벽도 쌓게 됐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과 로마제국의 등장은 스파르타를 신화와 전설 속으로 밀어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엔 일종의 테마공원이나 역사박물관이 되었다."(36쪽)

스파르타 이야기

폴 카트리지 지음|이은숙 옮김
어크로스|352쪽|1만8000원

김한수 출판 팀장

2011.09.24.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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