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목장
김기철 논설위원 조선일보 2018-05-23
▲ 베스트셀러 '그리스·로마 신화'를 쓴 작가 이윤기는 경기도 양평 작업실 부근에 나무 500그루를 심었다. 매년 5㎝씩 자라는 나무가 경이로웠던 모양이다. 그는 "나무는 '시간'에 다는 방울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를 심으며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렸다. 숲 가꾸는 일이 그만큼 즐거웠던 것이다. 2010년 이윤기는 양평 숲속에서 수목장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조문객들은 그가 번역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화음악을 틀어놓고 조르바춤을 껑충껑충 추며 고인을 추모했다.
▶수목장은 2004년 임학자 김장수 고려대 명예교수의 장례가 관심을 촉발했다. 김 교수는 일생을 바친 숲과 나무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평소 아끼던 50년생 참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후 화장한 유골의 골분(骨粉)을 나무나 화초, 잔디 아래 묻는 자연장이 급증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경북 명문가에서도 수목장이나 자연장으로 집안 장례를 치르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례가 어제 경기도 곤지암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유난히도 숲과 나무를 좋아하던 고인이었다. 결국 평소 아끼며 즐겨 보던 그 나무 아래에 묻혔다. 풍수 좋은 널찍한 명당에 번듯하게 봉분과 비석을 세워도 별스럽게 보이지 않을 법한데, 구 회장은 땅 한 평 차지하지 않고 숲으로 돌아갔다. 장례도 조문이나 조화도 받지 않고 3일간의 가족장으로 치렀다. 허례허식투성이인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구 회장이 누운 곳 인근엔 고인이 만든 화담숲이 있다. 잣나무·벚나무와 백합·미나리아재비 등 식물 4300종, 천연기념물 327호 원앙과 뻐꾸기·박새 등 조류 25종이 어울려 사는 생태 공원이다. 고인이 지난 2006년부터 경기도 곤지암에 41만평 규모로 조성했다. 봄가을이면 형형색색의 꽃과 단풍으로 물든다. 1년에 두 번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 경이로운 체험이다. 구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선물이다.
▶'말단 직원에게도 존댓말 쓴 회장님' '의인(義人)을 도와주는 기업인' '작은 약속도 소중히 여기던 분'…. 구 회장에 대한 추억담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고인이 기업만을 남겼다면 이런 추모 열기는 없었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소탈하게 살다 그렇게 간 사람의 향기가 사회에 퍼지는 것 같다. "메뚜기 이거 한번 먹어보소. 맛있어요" 하며 웃던 고인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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