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쌀장사 2
천(川) 자 표를 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준 적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택호인 월천(月川)에서 따오지 않았나 싶다. 내 생각에는 이 천(川)자 표시를 혹시라도 우리 집을 상징하는 휘장(徽章)이나 문장(紋章)을 만들 기회가 온다면 그때 써먹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계속 쌀의 양이 불어나자 이젠 기차를 이용하기가 불편해서 트럭을 이용했는데, 전쟁기간 중이라 군인들이 이른바 ‘후생사업’이라해서 군용 트럭을 화물운송에 투입해서 민간인의 중량물을 운반해 주고 운임을 받는 것을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알게 된 사람이 공군에서 후생사업을 하던 이현량 씨였으니 그 사람과 한동안 서로 좋은 단골로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부산에 가서 한 트럭의 쌀을 팔고 받아온 돈이, 그때는 화폐개혁 전이라서 천환짜리가 마대로 몇 부대여서 아버지가 지게로 지고 와야만 했는데, 기차에서도 워낙 돈의 부피가 크기 때문에 어디다 숨길 수가 없어 차라리 누구든지 쳐다볼 수 있는 기차 선반 위에 버젓이 올려놓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선반에 있는 것이 돈 부대인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도둑맞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때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면 캄캄하여 누군가 훔쳐갈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사람의 눈이 그 돈이 든 부대를 공동으로 감시하고 있으니 어둠이 짙다 할지라도 누가 감히 그걸 훔칠 수 있었으랴. 그렇게 가져온 돈다발을 어머니와 내가 밤늦도록 헤아리곤 했는데, 100장 묶음에 99장이 있는가 하면 101장이 묶인 것도 적지 않았고, 지폐 종이의 질이 나쁜 때의 헌돈이어서 반쪽으로 갈라진 것은 일일이 밥풀로 붙여서 한 묶음씩, 또 한 다발씩을 만들어 다음 장날에 쌀을 살 수 있게 준비를 해 두곤 했다.
집에서도 큰돈이 든 부대를 어디 깊이 감추지 않고 아무렇게나 여기 저기 처박아 두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강도가 오더라도 어느 농 밑에 감추기보다 더 안전하다고 했다. 사실 자루에 든 큰돈은 농 밑에다 넣을 수도 없는 부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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