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마을

경주시청 홈피 ‘관광 경주’의 ‘지명유래’ 란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龍明里)

장승(長承) : 약 100년 전 과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마을 남쪽 큰길 거리에 돌로 만든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장승(長承)'혹은 '장생이'라 불렀다. 지금은 장승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마을 이름만이 '장승'으로 남아 있다.

이것으로 마을 이름이 ‘장승’에서 유래했음은 확실하며, ‘장시’란 것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주시청 홈피의 내용 중

“약 100년 전 과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는 삭제하거나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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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마을은, 건천 분지의 중앙인 평야 한가운데에, 예전 4번 국도(신작로)의 동쪽에 위치하며, 마을 앞에 있는 ‘동묏거리(현지 발음: 동메껄)’에는 자그만 동산인 ‘동뫼산’이 있는데, 그 ‘동묏거리’에 예전엔 장승(長承)과 더불어 원(院)이 있는 등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마을 앞에 장승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이 ‘장승’이 되었다.

‘동묏거리’에 장승이 서 있었다는 증언(1985.09.18 녹음)은 이 원동(이기수) 노인에게, 2 개의 나무 장승이 있었다는 얘기(1983.09.19 녹음)는 김 월천(김학봉) 노인에게 직접 들은 바 있으나, 아무도 실물을 확실히 보았다는 어른은 찾지 못하였다.

고려·조선 시대의 공공 여관이던 ‘원’의 터는, 지금의 모모 주유소 자리로 합쳐졌지만, 이 주유소 자리는 원래, 앞쪽의 정미소 터와 두룩굴(두릅골, 이수기의 부)댁 집과 윤영조 씨댁 및 그 뒤에 밭인 상태의 ‘원터’ 등 4 필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 ‘원터’ 자리에서는 낡아서 삭아빠진 기와 조각(사투리로 쟁깨미, 이는 암쟁깨미와 숫쟁깨미로 나눔)들이 1950년대까지 심심찮게 출토되곤 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다가 빻아서는 놋그릇을 닦곤 하였다. 기와가 거의 폭삭 삭아버린 것으로 봐서, 원(院)이 있다가 낡아서 허물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믿어진다.

경주(慶州)와 영천(永川)을 잇는 남북 대로(大路)인 조선시대의 구도(舊道)가 장승 마을 서쪽으로 지나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명확히 남아 있다. 손(孫) 맹촌댁(손상호 조부)에서 원(院) 터 가까운 ‘잘감보’의 ‘중보(中洑)’ 쪽으로 달구지길 자국이 옛날 그대로 남아, 지금은 좁고 기다란 논배미들로 변해 있다.

그리고 ‘동묏거리’와 ‘원터’의 위치는, ‘장승’ 마을 동쪽인 ‘밀구’ 마을에서 ‘동뫼산’을 지나 서쪽인 ‘돈지’ 마을과 ‘우중골’로, 나아가서 청도(靑道)까지 연결되는 동서 소로(小路)가, 남북 대로(大路)인 구 도로와 만나는 교차 지점이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광복 때도 있었던 여러 오두막집과 ‘원터’의 삭은 기왓장 등으로 미루어보아, 지금부터 100년 전이 아니라 그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늦어도 1800년대인 19세기 또는 그 이전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장승 마을의 나지막한 오두막집들은 토담에 초가지붕을 얹고, 대오리를 엮어 창호지를 바른 외짝 여닫이 식 지게문이 달린, 2개의 방과 부엌뿐으로 마당도 매우 비좁은 삼 간짜리가 대부분이었다.

옛날 4번 신작로에서 ‘종강’ 개울을 따라 내려오는 ‘뒷각단’에, 첫 번째 서(徐) 도천댁(신기댁의 부, 서병락과 칠뿔이(아명)의 조부, 도천댁이 살기 전에는 시모댁이 살았다) 집, 임 부학댁(지호댁의 부, 임경택의 조부) 집을 지나 김 송천댁(김영한의 부) 집의 사랑채 자리에 있던 1) 김학서(學瑞, 김학봉의 부, 김주석의 조부) 어른 집, 그 다음 2) 정 부동댁(정정순의 부) 집, 3) 이 신전댁(이경오의 부, 이영식의 조부) 집 4) 김부출 씨 동생(김재석의 숙부) 집 오두막들이 나란히 4 채 있었고, 또 동통로(洞通路) 변에 5) 지금 안 재운(안원준의 부) 씨가 사는 이(李) 내동댁(이청기) 집, 6) 석매(연자매) 방앗간 집(화동댁 부인의 모, 서잠태의 조모)이 살던 집 및 7) 강(姜) 학동댁 집(강도석의 부, 위치: 동통로를 따라 밀구로 가다가 ‘종강’ 개울을 건너기 직전 오른쪽 모퉁이) 등이 모두 기어들고 기어 나오는 형태의 오두막집들이었다. 이들 그을음에 온통 새까맣게 찌든 오두막집은 197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그 뒤 모두 근대식 초가집으로 개조 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장승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여름엔 벼농사를 겨울엔 보리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광복을 전후 하여, ‘웃개’의 이규희(이재천, 이재호의 부) 씨와 이길희(이재작의 부) 씨 형제의 것, ‘굼밭’의 우(禹) 호상댁(우해성의 부, 우방우의 조부)과 이 원동댁(이종근, 종구의 부) 것 등 4 곳에 사과 과수원이 먼저 생겨났고, 그 뒤, 김춘수 씨, 김영만 씨, 김영길 씨, 이종구 씨, 임 지호댁(임경택, 원택의 부), 박 서기(박태준, 외준의 부) 댁, 시노댁(정예동의 부) 등등의 여러 과수원이 ‘큰개울’(大川) 동편의 넓은 하천부지에 빈틈없이 생겨났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차츰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광복 무렵에는 ‘장승’ 마을에 주막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 저동댁(이영우, 춘우, 시우의 부) 집과 두룩굴댁(이수기의 부) 집 자리에 ‘돈지’ 마을에 살던 최 노실댁(최정찬의 부)이 새집을 지어 주막을 열었다가 1950년대 이후 주막 일을 접고 두룩굴댁의 주택으로 쓰였다.

옛날 4번 신작로(新作路) 동편이고 마을의 맨 앞쪽에 있던 두룩굴댁(이수기의 부) 집 앞에 청도 출신 윤 모 씨(윤창욱의 부)와 지금의 떡 방앗간 부근에 ‘단숯골’ 사람 윤근 씨네가 운영하던, 트럭 엔진을 개조하여 왕겨를 연료로 하는 2 개의 정미소가 있어, 광복 후에 없어진 연자방앗간을 대신하였지만, 1950년대에 생겼다가 오래 가지 못하고 둘 다 없어졌다. 여기서 ‘옛 4번 신작로’란, 건천 분지 동편의 새 4번 국도가 개통되기 이전, 건천 분지 가운데를 남북으로 달리던 국도(신작로: 생긴 년대는 불명)를 뜻한다.

그리고 김학서(김학봉의 부, 김주석의 조부) 어른 댁에 박오중(박성학의 부) 씨란 펜수장이(대장장이)가 세 들어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 대로변 어디쯤에 1930년대엔 대장간이 있었음직하다.(박성학의 모친은 김학서의 수양딸이었다).

1960년대에 잠시 ‘웃개’에 클로렐라 공장이 들어선 적이 있고, 마을 앞 시내버스 정류장 건너편 ‘신평’ 땅에 술도가(아화 양조장의 지점격인 막걸리 양조장)가 들어 선 적도 있으나 오래지 않아 사업을 접었다.

‘장승’ 마을의 소위 말하는 근대식 초가들은,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이 슬레이트로 개량되기 전까지 거의 모두, 오두막에서 조금 발전하여 방과 부엌이 오두막보다 좀 넓고 안방문은 지게문 대신 2 짝으로 된 미닫이였고, 집은 위채와 아래채로 구성되었는데 가끔은 디딜방앗간 채가,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디귿자 모양으로 배치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1980년대까지 기와집은 매우 드물었지만 그 이후에는 2층 집도 짓고 양옥집들도 생겨났다.

장승 마을을 세분하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종강’ 개울을 중심으로 그 북쪽을 ‘뒷각단’ 남쪽을 ‘앞각단’이라 하고, 대여섯(이화근, 지동댁, 이규희, 이길희 및 단오댁=박용순(박상국의 부)과 화촌댁) 집이 살던 ‘웃개’(최근에는 ‘웃장승’이라고도 함)와 대여섯(괴동댁, 김병익, 이청길, 대전댁(학촌댁의 부, 송진호의 조부)) 집이 살던 ‘아랫개(일명 디나리)’의 3 부분으로 나누며, 더 세분하면, 이 씨네(밀구 이 성동댁의 큰집)가 한때 살았던 ‘큰오관’(현지에선 ‘큰오갱이’라 함) 지구, 구해룡 씨네가 잠시 살았던 ‘송진이’ 지구와 ‘굼밭’ 지구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한편 장승 마을과 밀구 마을 중간에, ‘큰개울’이 지나다가 에스(S)자 형태로 휘감으며 생긴 지형인 ‘굼밭’ 지구에는 정(鄭) 한범댁(정범기의 부), 임(林) 부학댁(지호댁의 부, 임경택의 조부) 정(鄭) 정촌댁(시노댁의 부, 정예동의 조부) 등 열두세 가구가 살았는데 1930년대 초에 발생한 대화재로, 마을이 전소(全燒) 되는 바람에 거의 대부분이, 그때 40여 호가 살던 ‘장승’ 마을로 옮겨와서, 장승 마을 본동의 가구 수가 50여 호로 늘어났다고 한다.(김 월천 어른의 증언).

장승 마을에, 2000년대 들어서는 85호가 ‘장승’ 본동, ‘웃개’와 ‘아랫개’ 지구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광복 이후로 전출입은 더러 있었지만 총 가구 수의 변동은 별로 없는 편이다.

현지 발음으로 장승 마을 이름을 ‘장싱이[장′시˜이˜]’ 또는 ‘장시’란 것은 ‘장승’의 사투리이니 신경 쓸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 보면, ‘동묏거리’에 ‘돌’장승이 있었느냐 ‘나무’ 장승이 있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마을 앞 ‘동묏거리’에 원(院)과 ‘장승’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지리적 여건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 이름이 ‘장승’이 되어야 마땅할 이유들은 충분히 밝혀진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름지기 오늘날 장승 마을 앞 ‘동묏거리’에다, 모두의 뜻을 모아 옛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는 뜻에서 새로이 장승 한 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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