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거지 같다
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
입력 2020.02.24 03:16
'거지 같다'는 시장 상인의 하소연… 요즘 국민들 마음 정확하게 표현
정권, 줄기차게 국민 목소리 외면… 과연 이 난국 헤쳐나갈 수 있는가
한현우 논설위원
며칠 전 시장통 상인이 대통령에게 한 말은 요즘 국민들의 심기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좀 어떠세요?"라는 포괄적 질문에 "거지 같아요"라고 포괄적으로 답했다. 그리고 거지 같아진 이유 세 가지를 들었다. "너무 장사가 안돼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였다. 이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된 거예요?"다. 장사가 안되고 경기도 안 좋은데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니 화가 나고 거지 같은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거지 같다'와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울게 생겼어요." 보통 사람들은 거지 같을 때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구걸하는 사람이 많던 시절엔 거지란 말을 흔히 썼다.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으면 아이들끼리 '땅거지'라고 놀렸다. 이젠 구걸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거지란 말도 거의 안 쓴다. 그러나 '거지 같다'는 말은 살아남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거지 같다'는 단어가 없다. 누구나 뜻을 달 수 있는 '우리말샘'에는 있다. '보잘것없고 시시하여 마음에 달갑지 않다'고 풀이해 놓았다. 그 상인은 장사가 너무 안되는 데다가 폐렴 바이러스 때문에 손님이 더 줄어 아주 죽을 맛이다. 그 답답한 마음을 '거지 같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거지 같아요'로 검색을 해봤다. 여러 가지 케이스가 있었다. "아이 보고 살림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신랑은 맨날 술 마시고 다녀요." "큰맘 먹고 비싼 물건 샀는데 금방 고장 나고 환불이나 교환도 안 된대요." "회사 내규에는 출산휴가에 육아휴직을 이어 쓸 수 있게 돼 있는데 상사가 휴직을 못 하게 해요." 전부 거지 같은 경우다.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 미칠 때,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을 때, 누군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거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즘 높은 사람들이 시장을 찾는 일이 부쩍 잦다. 그때마다 그들의 생각이 민심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국무총리는 손님이 줄었다는 상인에게 웃으며 "편하시겠네"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한술 더 떠 "많이 벌어놓은 걸로 버티셔야지"라고 했다. 그 대화를 전해 들은 자영업자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손님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 없어야 콧노래가 나오는 게 자영업자다. 대통령 부인은 상인과 만나 "예쁘시네요" "마스크 벗으면 더 예뻐요"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금 이 나라에 무슨 경사라도 났나. 세월호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할 만큼 안전한 나라를 강조했으면, 난리 통에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는가.
국민은 일상 언어로 말할 자유가 있다. 그들이 준 표로 권력을 쥔 자들은 그 말을 겸손하고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 이 정권 사람들은 국민 말을 들을 생각은 않고 늘 논평하려고 든다. 옳은 말 하는 국민을 정적(政敵)처럼 여긴다. 조국 사태, 탈원전 쇼, 허구적 소득 주도 성장, 부동산 정책 실패, 선거 개입과 검찰 수사 방해까지 국민들은 줄곧 "거지 같다"고 외쳤다. 그런데 전혀 듣지 않고 맘대로 밀어붙였다. 모든 게 자기들 덕분에 잘되고 있다고 해왔다. 그러니 시장에 나와도 분위기 파악이 안 돼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런 와중에 어찌해볼 도리 없는 전염병까지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권력이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지만, 국민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정권이 과연 이 난국을 잘 헤쳐나갈지 불안하다. 그래서 거지 같다. 요즘 하루하루 살며 버티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진짜 거지 같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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