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독립운동이 시작된 '봉황각'과 '중앙대교당'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발행일 : 2019.02.28 / 기타 F2 면

비밀의 두 공간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 이 일은 강력한 조직을 가진 천도교만이 가능하다."

1910년 8월 국치(國恥) 소식이 알려지자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중앙총부 조회에서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이보다 두 달 앞서 의암은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 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주권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라 했다.

의암 선생은 단계적·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특이한 점은 건물 2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서울 우이동 '봉황각'과 종로 한복판 경운동의 중앙대교당 건축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방식은 '외곽에서 중심으로', 첫 단추는 서울 도심에서 30리길인 우이동에 수련시설 봉황각 건설이었다.

'값의 고하를 묻지 말고 3만평을 확보하라.' 1911년 의암은 토지 구입에 관한 명을 내리고 이듬해 6월 봉황각을 완공했다. 비록 28평짜리 한옥 건물이었지만 이곳에선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21일 기도' '49일 기도'를 통해 연인원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소집돼 특별수련 과정을 거쳤다.

◇정신무장·조직점검 아지트 봉황각

당시 '미아리부터 우이동까지 민가가 거의 없었다'(봉황각 의창수도원장 박충남)고 한다. 비밀과 보안을 유지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명목은 '수련'이지만 장차 벌어질 독립운동을 위한 정신무장과 비상연락망 점검까지 노린 포석이었을 것으로 천도교측은 보고 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당시 수련회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 35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에 300만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런 막대한 자원을 독립운동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지휘본부이자 비밀 아지트가 봉황각이었던 것이다.

지난 22일 오후 찾은 봉황각. 지금 이곳은 북한산 등산로 입구다.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산로 바로 옆 봉황각은 고즈넉했다. 한옥 기와지붕 위로는 북한산과 도봉산 연봉(連峯)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입구 아치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태극기가 빽빽히 꽂혀 있었다. 박충남 원장은 "초중고 학생 등 연인원 4000명 정도가 봉황각을 찾는다"고 했다.

의암이 기획한 독립운동 2단계는 서울 경운동 '중앙대교당' 건설이었다. 1918년 의암은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를 신축하기로 하고 전국의 교인들에게 가구당 10원 이상의 건축헌금을 내도록 했다. 1918년 12월 의암은 전체 천도교인들에게 '49일 특별기도'(종령 120호)를 지시한다. 기간은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이 기간 동안 청수(淸水) 한 그릇과 백미(白米) 5홉, 촛불 3개를 준비해 매일 오후 9시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기도 주제는 '포덕천하 광제창생'. 이에 앞서 의암은 1918년 12월 24일 간부들에게 "먼저 보국안민(독립)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49일 특별기도가 독립운동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또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 전국 9개 대표 기도지를 정하고 이곳에 간부를 파견해 기도식을 지도하게 했다. 특별기도가 진행된 기간은 천도교가 중심이 돼 3·1운동의 얼개가 짜여진 시기와 겹친다. 이 기간 동안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독립 선언서 작성과 민족대표 구성을 위해 숨가쁘게 뛰어다녔다. 이 비밀 운동에 '중앙대교당 신축 헌금'이 쓰였다. 개신교계 운동자금으로 5000원, 독립선언서 인쇄 현장을 덮친 조선인 순사를 매수하는 데 쓰인 5000원도 이 돈에서 지출됐다.

◇대교당 건축 명분 독립운동 자금 모아

중앙대교당은 100년이 흐른 지금 봐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특히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층 212평 공간은 1~2층이 틔여 천장이 높은데다 중간에 시야를 가리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 중앙대교당보다 앞서 건축된 천주교 약현성당(1892)과 명동성당(1898)은 중간중간 기둥 때문에 곳곳에 사각지대가 있다. 중앙대교당은 당초 설계 때에는 현재의 2배인 400평 규모로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가 안전을 이유로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3·1운동으로 천도교 지도부가 대거 투옥되고 일제가 착공을 막는 바람에 1920년 2월에야 공사를 시작해 1922년초에 준공할 수 있었다.

봉황각과 중앙대교당·중앙총부 건축을 명분으로 전국적·민족적 독립운동의 큰 그림을 그렸던 의암. 그러나 의암이 정작 이 건물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사후(死後)다. 그는 1919년 11월과 이듬해 6월 잇따라 뇌출혈로 옥중에서 쓰러졌다.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1922년 6월 5일 중앙대교당에선 의암의 영결식이 열렸다. 수천명의 눈물 속에 영결식을 마친 의암의 시신은 우이동 봉황각 앞산 양지 바른 언덕에 모셔졌다. 의암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던 중앙대교당과 봉황각은 각각 영결식장과 유택(幽宅)이 됐다.

박충남 원장은 의암 선생의 부인 주옥경(1894~1982) 여사를 생전에 만났던 이야기를 전했다. 주 여사는 3·1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이 투옥되자 서대문형무소 앞에 집을 얻어 33인의 옥바라지를 도맡았으며 이후 천도교 여성운동에 앞장선 선구자다. 만년의 주 여사는 박 원장에게 "3·1운동 때에는 전국에서 인물, 조직, 자금이 제일 많았던 것이 천도교였는데, 광복이 되고 나니 인물, 조직, 자금이 가장 적은 종교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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