展示會 招待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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展示名 : 無心書家 春江 徐廷建先生 招待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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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일자 : 2019. 36-12

전시장소 : 인사동 한국미술관(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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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식 : 2019. 3-.6. 오후 3

작가와의 대화 : 2019. 3. 19. 오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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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석주미술관 협찬 : () 인풍

후원 : 한국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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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전시초대를 받고 지금부터 그 始末을 남갸서 알리려 한다. 나에 데한 격려의 글들은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수서 없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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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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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石舟는 내가 보낸 글씨(2,000여점)愛藏하고 항상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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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되면 세상에 알릴만 하다.” 고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적극 만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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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알릴만한 글씨도 못되고, 알린 후에 사람들의 조소거리나 될 것이니 무리한 일을 하지 말라.” 고 권고했다.” 벗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서 몇 년 전부터 전시회 추진팀을 구성하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토론했다고 한다. 그 분들은 한국서단의 거물들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지명도가 높은 분들이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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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얼마 전에 마음을 굳히고 2019. 3. 6-12일까지 전시회를 열기로 확정하고 인사동에 있는 한국화랑 전관(400여평)을 예약한 후 나에게 연락했다. 그 기간에 맞춰서 고국을 방문해야 하니 건강을 잘 챙기라는 부탁도 겸했다. 작품전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막대한 비용과 수고가 수반하는 일인데 힘든 일을 해내 갰다고 작정한 것이다. 전시추진위원장에는 당대 서예계의 거장인 何石 朴元圭공이 자청해서 맡기로 하였고 전시추진위원 20여명이 참여하여 진행하기로 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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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일 생중에 무상한 예기치 못한 영광이다. 대작을 위시하여 200여점이 전시되지만, 내가 써놓은 작품의 5%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점점 늙어가니까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 뜻이 비할 데 없이 고마우나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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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 나라로 이주해서 좋은 시간을 독서와 글씨쓰기와 또 글쓰기에 전념했다. 옛 사람의 글을 읽다가 그 내용이 좋으면 붓을 잡고 써보곤 하였는데, 1)누구에게 보이거나 자랑할 마음도 없고 2) 상품가치로 여긴 적도 없어서 평생 한 점도 대가를 받고 써준 일이 없었다. 그저 無心한 마음으로 글 내용이 좋아서 써본 것들을 모아둔 작품이었다. 나의 無心히 써 노은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有心히 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하니, 나만이 간직한 애장품이 타인에게 발각되어 이야깃거리로 되게 되었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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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쩔 수 없이 구경 가는 기분으로 전시회를 참관할 예정이다. 圖錄을 발간하는데 필요하다하여 몇 자 쓰라는 부탁을 받고 <書家>을 아래와 같이 써서 보냈다. 나의 일생에 기대하지 않았던 영광으로, 마른 나무(枯木)가 이 봄을 만나서 가지에 꽃이 피는 격이다. 모든 꾸지람을 해주시는 충고들도 겸허하게 교훈으로 받을 것이다. 나의 벗과 열심히 이 일을 돕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벗의 부탁으로 <書家>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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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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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다년간 전력회사에 종사했다. 발송배전(..配電)분야에 기술사(技術士). 내 나이 56세에 조국을 떠나 미지의 북미지역으로 이주했다. 나이 들어 할 일도 없고 늙어가면서 한적한 삶을 살고자하여 넓은 세계로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내 아이들 넷이 모두 성장하였으므로 서둘러 독립시키고 아내와 둘이서 살게 되었다. 말도 풍속도 다른 이국땅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고국에서부터 내가 하고 싶던 비전공분야의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독서를 하고 여행도 해보고 붓글씨를 쓰고 글을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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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배울 사람이 없어서 나름대로 쓰다가, 동기가 되어서 한자성경을 썼다. 4년여에 걸쳐 신구약 전서를 완서하였는데, 나의 계산으로는 약 5,000여 시간이 걸렸으며 총 백 이십만 자의 분량 이었다. 나무로 궤를 만들고 수장하였다. 서예 분야에서 문외한인 사람도 이처럼 많은 글을 정성들여 싸보니 글씨쓰기에 취미가 붙고 글씨가 좌우정열이 되었다. 법도 없고 도도 없지만 누구나 읽을 수는 있게 되었다. 붓을 잡는 일에 취미를 붙인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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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사람이 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했다. “세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평생 해로하는 일이고, 둘째는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의 벗을 만나는 일이고, 셋째는 의문 나는 것을 묻고 배울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일이다.” 하였다. 나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내 경우를 뒤돌아보니, 나에게 둘은 갖추었는데 스승은 만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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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옛 사람이 남긴 많은 고서를 탐독하다가 그 속에서 스승을 만나고 벗도 조우했다. 책을 읽다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논한 분은 모두 나의 스승이고, 나의 생각과 근접한 이들은 나의 벗이었다. 책 속에서 두 사람을 만날 때는 마음이 정말 기쁘다. 나는 그때 마다 좋은 글을 읽고나면 내 손으로 써보고 싶었다. 옛말에 <언제나 선한 일을 들으면 내 마음이 먼저 기쁘고 기이한 글을 읽으면 내 손으로 써보고 싶다(每聞善事心先喜 但見奇書手自抄)>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옛 사함의 글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붓을 잡고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60대 중반이다. 쓰는 기준은 작품을 쓰려는 작가의 마음으로 정성껏 쓰고 반드시 낙관을 해 두었다. 나는 배운 글씨가 아니지만 글을 암송하는 습관 때문인지 속필로 썼다. 명가들이 쓰는 서도나 서예는 모른다. 다만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고 가끔은 서의(書意)가 발동하면 행서도 쓰고 전()도 써보았다. 대부분 해서와 예서를 많이 썼는데 결구(結構)와 조화(調和)를 중시했다. 쓰려는 글이 언제나 분량이 많아서 큰 글씨를 쓰지 않았으며, 먹을 갈고 종이를 절약해야 했으므로 작은 글씨를 많이 썼다. 아무런 목적도 없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의도도 없었다. 글 내용이 좋으면 글씨가 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15년 동안 줄 잡아(소품을 포함하여) 수천 점은 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서가(書家)라고 지칭했고 서법가(書法家)나 서예가(書藝家)등의 호칭을 쓰지 않았다. 내가 경제적 생산성이 없는 일에 20 수년을 매달려도 한마디 불평 없이 네 옆에서 묵묵히 나를 도와준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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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공계출신은 글 쓰는 일이 서툴다. 동기가 부여되고 처음 컴퓨터를 익히면서 69세부터 평소 나의 생각을 간추려서 틈틈이 글을 쓰고 몇 권의 책도 출판했는데 지금까지 쓴 것을 모두 간추리면 20여권은 될 것이다. 글씨를 쓰고 글을 쓰면서 많은 고서를 읽었는데 천성이 둔하여 다 기억하지 못하고 먼저 읽은 것은 모두 잊고 산다. 어려서부터 오류선생(五柳先生)을 좋아하여 마음이 세속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그 분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 고국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마음 허여할 벗도 드물고 친척도 없다. 자연 속에 파묻혀서 조용한 일상 속에서 늙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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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석주(石舟)가 멀리 내 집을 방문했었다. 나의 일상을 보고 내가 써놓은 글씨를 보더니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내 집 뒤뜰이 넓으니 죽기 전에 모두 그 곳에 모아놓고 태워버릴 작정이요.” 하니 펄쩍 뛰면서 무조건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망설이다가 나의 분신이기도 하니 고국에 가서 재가 되더라도 좋겠다.“ 여기고 간추려서 벗에게 보냈었다. 벗은 너무나 애지중지하여 나를 대하듯이 사람들에게 자랑한다고 했다. 분수 밖의 대접인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른다. 벗은 또 <사람들에게 보이고 평가를 받고 싶다.> 면서, 큰 전시를 계획 하니, 나를 오라고 한다.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고 설레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전시회는 여러 사람의 공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부족하고 용열한 작품을 세상에 보여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벗에게 여러 번 만류 헸어도 소용이 없었다. “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공력을 들여서 잘 쓸걸 그랬구나.” 하고 혼자서 멋쩍게 웃는다. < 의도(意圖)가 없는 곳에 진정성(眞正性)이 있음> 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 일을 위하여 시간과 애정을 쏟아주신 <사춘회>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나의 석주공 에게는 세치 혀로 그 고마움을 표현할 수가 없다 아마도 삼생의 연이 맺어진 벗인가 보다. 나의 인생 후미에 가장 큰 영광의 선물을 안겨준 분이기기 때문이다. 다만 배우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질정을 겸허하게 받을 것이다.

 

춘강 서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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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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