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길 2

회고록 2019. 2. 13. 01:50

피란길 2

 

  아이들은 소를 몰로 고내 뒷산에 가서 풀을 뜯기곤 했는데 어느 날은 산에 가서 보리포구(보리수)’ 열매를 따먹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까부던지(진드기) 새끼들이 용하게도 내 몸에 기어 올라와서 살 두꺼운 데는 물지 않고 살 보드라운 데만 골라가며 들러붙어 피를 빠는 통에 혼쭐이 났던 기억만 남았다. 이 녀석들은 이나 빈대 벼룩과 달리 살 속 깊이 주둥이를 박고 피를 빨아먹는 탓에 살갗에 붙은 것을 몸통을 잡고 잡아떼면 생살점이 왕창 떨어져 피도 나고 몹시 따갑고도 가렵고 또 아팠다. 그게 얼마나 지독했으면 나도 권실이도 피란하면 진드기 생각부터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아주 진저리나고 몸서리쳐지는 기억의 단면이다.

 

  아주 뾰족한 고내 뒷산에 올라서 보면 까마득히 우리 집이 위치한 곳이 저 멀리 어렴풋이 짐작으로 내다보였는데, 나중에 장승동 집에 와서 그쪽을 바라보니까 화천의 그 산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화천 피란 시절의 반찬은 고작 된장이라 그게 떨어지면 어머니는 장승동 집에 가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런데 장단지를 이고 30리 길을 오자면 고개가 아프니까 중간의 모량(牟梁) 어느 집에 하루쯤 맡길 참으로 부탁했다. 그 집에서 피란민이 이리 많은데 누구에게 이걸 내주느냐하니까 어머니는 울타리의 마른 꼬챙이를 꺾어 신표(信標)를 만들고는 둘 중 하나를 내밀며 이걸 대조해 이가 맞으면 내어주라.”고 했단.

 

  고구려 주몽의 아들 유리가 일곱 모 난 돌 밑에서 찾은 도막 칼 조각을 맞춰보고 부자(父子) 관계를 확인했다는 것처럼, 전쟁 와중에도 우리 어머니답게 슬기로운 신표를 만드신 셈이다. 어머니가 남다르게 만들어 쓴 신표에는 사금파리 조각도 있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거상들의 사금파리 어음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장승동 집에서 기르던 돼지와 토끼와 닭들은 그냥 우리 밖의 마당에 다 풀어놓고 피란을 갔고, 나중에 돌아와 보니까 누군가가 돼지와 닭은 다 잡아먹고, 장롱이고 쌀독이고 장독대고 뭐 하나 온전한 것이 없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살림살이 가운데 쓸 만한 것들은 모조리 다 가져갔는데, 토끼만은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녀석은 워낙 재빨라서 붙잡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토끼가 생나무 울타리 구멍 사이로 요리조리 숨는 바람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동안 야성도 무척 강해져서 우리가 돌아왔을 때 통통하게 살이 쪄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놈은 우리 집 뒷밭에 가서 배추나 무 잎사귀 같은 것을 뜯어먹기도 하고 겨울에는 버드나무껍질 등을 벗겨 먹기도 하면서, 그해 겨울을 울타리 사이로 숨어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그놈은 좀처럼 사람이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밤에는 혼자서 울기도 했는데 난 그때 토끼가 우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보리쌀은 쌀독에 담아 두고 갔는데 누가 다 퍼 가버리고 없었다. 국군이 인민군을 밀어 올리는 덕분에 영천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퇴각을 하여, 짧은 피란생활을 마치고 장승마을 집으로 귀가하였는데,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피란도 아닌 피란을 한 셈이다. 피란지에서는 종이모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가 가져간 것이 쌀뿐이었던지 꽁보리밥을 먹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행히 여름에 피란을 갔으니 추위에 고생도 하지 않았고 냄새나는 밥이지만 밥을 당장 굶지도 않았다. 아마도 7월에 피란을 떠났다가 8월 말이나 9월초쯤에 돌아온 듯하다.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는 50~60리 떨어진 영천 쪽에서 들려오는 야포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쿵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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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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