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생 2

회고록 2019. 2. 12. 01:20

날이 갈수록 피란민의 숫자는 늘고, 밥을 빌러 오는 피란민도 늘어났는데, 전선은 자꾸만 남쪽으로 밀리는 모양이라, 몇 주 후에는 고모네 식구와 그 일행들이 모두 부산 방면으로 먼저 떠나버렸다. 전쟁이 나자 건천학교는 육군 통신부대인 573부대가 차지해버렸기에 우리는 교실이 없어 여름에는 작원동사(동회 사무실)에서 공부를 했다. 가을에는 마룻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지만 그런 걸 얘기할 계제가 아니었다. 졸업할 당시에는 천포에서 못밑쪽으로 가다가 중간의 양지 바른 곳에 있던 최 씨네 재실(齋室)에서 공부했고 거기서 졸업사진도 찍었다. 천포에서 재실로 가자면 아담한 연못도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도 아렴풋하다. 아마 월골못인가?

 

  난로도 없는 재실 마룻바닥에 방석도 없이 엎드려서 공부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옷이라고 해야 아직 구호물자가 흔하게 나돌지 않던 때라 무명베라면 두껍기나 하지, 얇디얇은 옥양목 바지 두 개를 껴입고 갔으니 오죽했으랴. 그 겨울에는 눈이 펑펑 쏟아져 내 무릎에 찰 정도까지 대설이 내려서 마을 앞 동뫼산에서 집까지 소릿길을 따라 걷는데 200~300미터 거리를 30분 이상 걸렸고, 어찌나 애를 썼던지 이튿날은 다리에 알이 박혀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내가 커피를 처음 맛본것은 미군들이 버리고 간 전투식량인 씨레이(C ration) 찌꺼기에서였다. 그들이 길가에서 식사를 한 다음 버리고 간 것 가운데는 아주 작고 납작한 설탕 봉지(5x5센티)도 있었는데 그건 속에 흰 가루가 들어 있어 핥아먹으면 달콤했으나 검은 가루가 들어있는 것은 핥아먹으면 몹시 썼다. 그때는 그것이 커피인 줄 몰랐다. 그래서 흰 가루는 먹고 검은 가루는 먹지 않았다. 가끔 비누덩이처럼 생긴 치즈도 미군들이 버리고 갔는데, 우리는 그걸 먹지 않았지만 나중에 숙부(학술)님은 그걸 잘 자셨다. 유엔군 가운데 새까만 흑인들도 처음 봤다. 그때까지 피부가 검은 사람을 우리는 인도징또는 도찡이라고 했는데, 내가 처음 본 흑인은 검은 정도가 아니라 피부가 온통 반질반질했으며, 손바닥은 희끄무레하고 혀는 빨간 사람이라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제 봤던 흑인과 오늘 본 흑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 보여 곤혹스러웠다. 자기네도 우리 한국 사람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참 힘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까이 가면 갸라, 갓땜이라고 소리쳤다. 외국 군인들한테 초콜릿을 얻어먹은 기억은 없다.

 

  통신부대가 건천학교를 차지한 뒤로는 573부대 요원들이 다리에 무슨 장치를 차고 나무 전봇대를 귀신같이 오르내리는 것이 신기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양쪽 다리 안쪽으로 무슨 침 같은 것이 달린 것으로 전봇대를 척척 찍으며 올라가니까 미끄러지지도 않고 참 편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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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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