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지 한칸이 몇 cm인지 알아?
염수경 추기경이 던진 질문, 화장지 한칸이 몇 cm인지 알아?
입력 2021.03.24 06:00 | 수정 2021.03.24 06:00
두루말이 화장지. 과거 종교인들은 화장지 한 칸까지 아껴 섰다. /김한수 기자
염수정 추기경 서임 축하식에서 폭소가 터진 사연
지난 2014년 1월 서울 명동성당. 엄숙한 성당에서 폭소가 터져나왔습니다. 요즘 말로 ‘빵 터졌’지요. 이날은 새로 추기경에 임명된 염수정 추기경의 축하식 자리였습니다. 폭소가 터진 것은 정순오 신부가 사제대표로 축사를 할 때였습니다. 정 신부는 염 추기경이 가톨릭대 성신교정(신학대) 사무처장 시절 ‘휴지 한 칸’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느날 생활 훈화 시간에 염 추기경은 신학생들에게 ‘화장지 한 칸이 몇 Cm인지 알아?’라고 묻고는 스스로 ’11Cm’라고 답까지 알려주곤 “아껴쓰라”고 했답니다. 아마 염 추기경은 자로 화장지 한 칸 길이를 재어봤던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신학생들은 수십년이 지나 사제 생활을 하면서도 절약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염 추기경이 신학교 사무처장을 맡던 시절은 1987~1992년입니다. 당시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우리 경제도 상당히 성장하고 있던 시절이지요. 그럼에도 학교 살림살이를 책임진 사무처장 입장에선 절약 또 절약을 강조하신 셈입니다.
2014년 1월 염수정 추기경 서임 축하식 시작 전 염 추기경이 축하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 인사하고 있다. 이 축하식에서 '화장지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이덕훈 기자
사실 신자들의 헌금, 시주로 생활하는 종교인들에게 절약은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2006년 서울대교구 주교관 식당에서 최인호 작가 부부를 만난 정진석 추기경(가운데). 정 추기경은 이면지가 아니면 결재를 받지 않을 정도로 절약했으며 외부 손님도 구내 식당에서 맞곤 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은 ‘이면지 활용 달인'
천주교에서 절약에 관한 한 전임 정진석 추기경을 따라갈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재임 초반엔 결재 서류가 이면지로 작성된 것이 아니면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한여름에도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잘 안 틀었습니다. 가죽가방은 청주교구장 시절부터 수십년 쓰던 낡은 것이었습니다. 식사는 외식은 거의 없었고 항상 교구청 구내식당을 이용했지요. 지금도 남아있는 사진 중 최인호 작가 부부와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 역시 구내식당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다만, 정 추기경은 공학도 출신답게 합리적 이유가 있을 때는 자신이 생각했던 원칙도 바꿨습니다. 이면지가 그런 예인데요, 어느날 결재받으러 갔던 사제가 이면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퇴짜맞게 되자 “요즘 프린터는 한번 인쇄된 종이를 넣으면 망가질 수 있다”고 건의하자 이후로는 이면지가 아니어도 결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 추기경이 이렇게 절약과 검소하게 살았던 이유는 사제가 될 때 “나를 위해서는 최소한만 배려하자”는 다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수 스님. 그는 생전에 "아침에 화장실 가면 화장지는 세 칸, 치약은 새끼손가락 반 마디만 쓴다"고 말하곤 했다. /조선일보DB
성수 스님 “난 화장지 세 칸, 치약은 손가락 반마디”
앞서 염 추기경의 화장지 이야기를 하니까 떠오르는 스님이 있습니다. 성수(性壽·1923~2012) 스님입니다.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한 선승(禪僧)입니다. 조계종 소속으로 새로 스님이 되는 분들에게 계(戒)를 주는 조계종전계대화상도 지내신 분이지요. 2006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인터뷰했는데요, 당시 경남 산청의 폐교를 선원(禪院)으로 개조해 후학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계셨습니다. 스님의 여러 좋은 말씀 중에 화장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일갈하시더군요. “아침에 화장실 가면 휴지는 세 토막, 치약은 새끼손가락 반 마디만큼만!” 저로서는 치약 부분은 따라할 수 있지만 화장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수 스님 외에도 호주머니 속 화장지를 여러 번 재활용(?)하는 스님들은 여러 분 만났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당시 스님들의 공통적인 문화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철 스님의 누더기옷도 유명하지요.
1992년 템플턴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 평생 청빈과 절약으로 살았던 그는 상금 102만 달러를 북한선교를 위해 헌금했다. /조선일보DB
102만불 상금 받은 한경직 목사 “1분 동안 백만장자 돼봤네”
개신교에선 한경직(1902~2000) 목사와 방지일(1911~2014) 목사의 청빈과 절약이 유명합니다. 오랜 기간 한국 개신교의 어른이었던 한 목사님은 영락교회에서 마련한 사택도 ‘호화롭다’며 사양하고 남한산성 내 작은 오두막에서 노년을 보내다 돌아가셨지요. 사후에 남은 것은 예금통장도 땅·집문서도 아니고 수십년 쓰던 낡은 돋보기와 지팡이, 휠체어 정도였다고 합니다. 딱 한 번 한 목사님이 ’100만 장자'가 된 적이 있습니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던 때였죠. 상금이 102만 달러였지요. 시상식 후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봤네”라고요. 한 목사님은 상금을 즉석에서 북한선교헌금으로 바로 내놓으셨습니다.
102세까지 생존하며 한국 교회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방지일 목사. /조선일보DB
100살 넘게 생존하며 한국 개신교의 산증인 역할을 한 방지일 목사님도 평소 소매가 닳은 내복을 입으셨습니다. 물론 목회자답게 항상 깔끔한 양복 차림이셨지만 낭비는 극도로 싫어하셨지요. 방 목사님을 아는 분들은 “메모지 한 장도 아껴서 빈칸이 없을 정도로 쓰셨고, 성탄카드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서 보내주시곤 했다”고 회상합니다.
‘절약의 달인’인 이 분들이 성장하고 활동했던 시기는 우리 모두가 어려웠던 때입니다. 절약이 기본이던 시절이지요. 그럼에도 종교인들의 절약은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강했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자의식이 바탕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종교인은 직접 밭을 갈기보다는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이 사명이기 때문이겠지요. 헌금·시주로 생활하지만 금전에 대한 경계 역시 늦출 수 없었을 겁니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이 생전에 시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시줏돈 받기를 날아오는 화살처럼 여기라”고요. 요즘도 주변에서 “고향 부모님 용돈 보내드렸더니 절, 성당, 교회에 다 갖다 드렸더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자식·손주 걱정과 잘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시주·헌금이지요. 그런 간절함을 잘 이해했기에 옛날 종교인들은 화장지 한 칸, 치약까지 아끼고 또 아꼈고, 그런 간절함의 공명(共鳴)이 오늘의 한국 종교계를 만드는 토대가 됐다고 믿습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이제 ‘절약의 달인’들은 전설 속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은 일반 사람들과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신자들에겐 교리나 종교의 가르침 이전에 먼저 보이는 것이 종교인들의 삶이니까요.
요즘 화장지는 한 칸에 11.5Cm 길이다.
아, 참. 저도 궁금해서 화장지 한 칸의 길이를 자로 재어봤습니다. 11.5Cm 정도 되더군요. 염 추기경이 신학교 사무처장 시절에 비해 조금 길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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