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3.29 03:02

대전 대흥동성당 조정형 할아버지

"뚜, 뚜, 뚜우~."

28일 낮 대전 대흥동성당 종탑. 라디오에서 정오 시보(時報)가 울리자 조정형(73)씨는 줄에 매달려 온몸의 체중을 실은 뒤 힘껏 당겼다. 그의 몸짓에 따라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이 차례로 세 번씩 울렸다. 이어 큰 종을 스무 번 울린 그는 다시 줄에 매달렸다. 이번엔 종을 멈추기 위해서다. 종을 치는 시간은 단 1분. 그러나 그는 이미 20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120계단을 올라 11시 50분쯤 종탑에 도착해선 라디오부터 켰다. 12시 정각이 되기엔 아직 10분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줄을 잡고 기도를 올렸다. 그 표정이 엄숙했다.

 

조정형씨는 종을 칠 때 드러눕듯이 체중을 실어 줄을 당긴다. 일반 건물 5~6층 높이의 종탑을 50년간 매일 두 차례 이상 걸어 오른 그는 “덕분에 건강검진에선 신체나이가 젊게 나온다”며 웃었다. /신현종 기자

 

조씨는 50년 동안 이 성당의 종을 책임진 '종지기'다. 평일은 정오와 오후 7시, 주일인 일요일엔 오전 10시, 정오, 오후 7시에 종을 울린다. 성당 주변에선 세례명인 '방지거(프란치스코) 할아버지'로 통한다.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좌 성당인 대흥동성당은 1919년 설립돼 올해가 100년, 조씨는 그 절반의 역사다. 대부분 성당과 교회가 종을 치지 않거나 녹음된 종소리를 스피커로 들려주는 시대에 50년 종지기는 특별하다.

조씨가 대흥동성당 종지기가 된 것은 1969년 10월.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이곳에 왔다. 처음 종을 칠 때만 해도 일대는 허허벌판이었다. 종탑에 서면 대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처음엔 오전 6시에도 종을 쳤다. 그러나 일대가 개발되고 주택과 빌딩이 들어서면서 새벽종은 주변의 민원 때문에 치지 않게 됐다. 이젠 주변에 종탑보다 높은 건물이 즐비하다.

 

대흥동성당 박진홍(왼쪽) 신부와 함께한 조정형씨. /신현종 기자

 

종지기의 삶은 개인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종을 쳐야 하기 때문에 1박 2일 여행은커녕 웬만한 저녁 자리도 참석하지 못했다. 성당 구내 사택에서 생활하는 그는 50년을 한결같이 시계추처럼 살았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종을 치고 문단속을 했다. 그럼에도 정씨는 '보람'을 이야기했다. 성당에서 아내(2014년 선종)도 만났다. 근처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가운데 "종소리가 큰 위로와 힘이 됐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경우도 많다. 10년 전쯤 12일간 이스라엘, 이집트, 로마로 부부가 성지순례를 떠난 적이 있다. '대신 쳐 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주변의 강권 덕분이다. 순례를 다녀오니 "종소리가 달라졌다"며 성당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한 외국인은 "종소리를 들으며 향수(鄕愁)를 달랬는데 소리가 달라졌다"며 서운해했다. 대흥동성당 박진홍 주임신부는 "한번은 늘 시계처럼 정확하던 분이 정오에 종을 치러 올라가지 않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은 수능시험 날'이라고 하시더라"며 웃었다.

작년 연말 퇴직한 후에도 사택에 머물며 종을 치는 조씨는, 오는 10월 이 성당 100주년에 맞춰 '완전 은퇴'한다. 타종(打鐘)도 전자식으로 바뀐다. 박진홍 신부는 "할아버지가 연로하셔서 후임이 늘 걱정이었는데 현재의 종을 제작한 프랑스 회사가 점검한 결과 종은 문제가 없고, 대신 전자식 자동으로 치는 방식으로 개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회사는 작은 종 8개를 추가 제작하고 목제 틀을 철제로 바꿀 예정이다. 사람이 직접 치는 '손맛'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 것. 조씨는 "세월 따라 종 치는 방식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조씨에게 "지난 50년 동안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조씨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었다. 매일매일 종 치고 청소하고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박 신부는 "이제 매일 시간 맞춰야 하는 짐을 덜게 되시니 내년엔 편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모시고 다녀올 것"이라고 했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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