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은둔 끝에 조명받는 ‘땅설법’을 아시나요
삼척 안정사 땅설법, 문화재청 ‘미래 무형문화유산 육성 사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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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설법’을 아시나요?
문화재청은 최근 ‘미래 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 계획을 발표했는데, 올해 선정된 21건 가운데 강원 삼척 안정사의 ‘땅설법’이 포함됐습니다. 이 사업은 올해부터 2026년까지 각 지역의 무형유산 100종목을 선정하고 지자체와 협업해 지역 대표 문화자원으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업별로 연간 최대 2억원씩, 사업성과가 좋으면 3년 동안 지원을 계속하는 프로젝트이지요. 올해 4개, 내년엔 17개 종목이 선정됐는데 땅설법은 ‘하회선유줄불놀이’ ‘진도 지역 치기형 민속놀이’ ‘당진 합덕 천주교 연도(煉禱)’ ‘제천 엽연초 재배와 건조기술’ 등과 함께 내년 지원대상으로 선정됐습니다.
이 육성 사업에 포함된 것을 비롯해 최근 학계에서도 땅설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윤광봉 전 일본 히로시마대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의 불교민속과 연희예술’(민속원)이란 저서에서 땅설법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이 책에서 한중일의 불교 연희예술을 비교하면서 땅설법의 독특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무형문화유산 육성 사업에 포함된 다른 종목들은 이름을 들으면 대략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지만 ‘땅설법’은 많은 분들이 무슨 뜻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습니다. 저도 ‘땅설법’이란 단어 자체를 처음 들은 것이 불과 3년 전입니다. 2019년 4월 서울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시연회를 보면서 땅설법을 처음 접했습니다.
◇창, 마당놀이, 그림자 인형극까지...불교 가르침 쉽게 전해
처음 본 느낌은 “한국 불교에 이런 장르가 있었나?”하는 ‘신기함’이었습니다. 전통 연희(演戲)예술에 서커스까지 접목된 종합예술이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성주신 탈을 쓴 안정사 주지 다여(茶如) 스님이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물으면 바가지로 만든 용(龍) 탈을 쓴 신자는 “나는 우물신이요~”라고 받는 등 문답이 이어집니다. 용뿐 아니라 호랑이·소·말·개·뱀 등 동물 얼굴 모양 탈을 쓴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스님과 노래로 문답을 이어가더군요. 무대 위에는 접시 돌리는 사람, 공 3개를 번갈아 돌리는 저글링하는 사람까지 등장하고 종이로 만든 탑과 그림자 인형극까지 펼쳐지더군요. 탈춤, 마당놀이에 서커스까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스님과 신도들이 탈춤을 추면서 주고 받는 문답은 불교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시연회는 한국불교민속학회가 주최한 행사였습니다. 학자들도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웬만한 불교민속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이 학자들로서는 이런 형식의 땅설법은 낯설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날 설명을 들은 바에 따르면 땅설법은 한국 불교에서 전승되던 설법의 한 형식이었답니다. 설법은 사찰 법당에서 스님들이 신도들을 앉혀놓고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요. 그렇지만 일반 신도들에게 불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탄생한 것이 땅설법이랍니다. 가르침[講]과 노래[唱], 연극[演]의 요소를 합쳐 부처님 가르침을 대중에게 쉽게 전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얘기지요. 부처님이 천상의 신들에게 화엄경을 설하는 것과 비교해 지상(땅)에서 스님이 일반 중생을 대상으로 설법한다고 해서 ‘땅’이 붙었답니다.
◇‘석가모니 일대기’ 등 6가지 주제 전해져...전체 공연엔 보름 걸려
현재 ‘석가모니 일대기’ ‘목련존자 일대기’ ‘성주신 일대기’ ‘선재동자 구법기’ 등 여섯 주제가 전하고 있습니다. 한 주제당 길게는 8~10시간씩 이어지기도 하고, 여섯 주제 전체를 시연하려면 보름씩 걸리기도 한답니다. 이때문에 보통은 주제별로 맞는 날에 맞춰서 땅설법이 펼쳐진다지요. 이를테면 부처님오신날엔 석가모니 일대기, 백중에는 목련존자 일대기를 공연하는 식으로요.
2019년 당시 시연회에서는 ‘석가모니 일대기’와 ‘성주신 일대기’를 1시간 분량으로 요약해서 시연했습니다. 내용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성주신 일대기’의 경우, 집을 수호하는 성주신이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귀양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마당신, 우물신, 변소신 등 여러 신들이 나타나 도와줍니다. 이 신들은 성주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후 “성불(成佛)하거든 중생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침내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성주신은 부처님 법회에 참석해 화엄경을 듣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를 아시오?” “~일까요?” 등 문답으로 이뤄지고, 현장에서 객석의 관객도 참여시키는 등 마당놀이 같은 즉흥성과 참여성도 보였습니다.
신라시대에 원효 대사가 저자거리에서 설법을 했다는데, 이렇게 쉬운 방식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삼척 산골 사찰 안정사에서 스님, 신도들 전승
그렇다면 이렇게 흥미로운 불교민속예술이 그동안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 사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안정사가 철저히 고립됐었기 때문입니다. 안정사는 삼척 시내에서도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산골에 있는 작은 절입니다. 10여년 전까지도 화전(火田)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인근에 사는 토박이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이었답니다. 조계종 소속 사찰도 아니고요.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간화선(看話禪) 전통을 주된 수행으로 삼는 조계종은 민간 신앙과 접목된 불교 의식을 대부분 터부시했지요.
어려서부터 안정사에서 지낸 다여 스님에 따르면 1960년대 결혼하지 않은 비구 스님들 위주로 ‘불교정화운동’이 벌어졌을 때 쫓겨난 스님들이 안정사에 와서 기거하면서 땅설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덕택에 다여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땅설법을 보고 배워 익혔지요. 인근 주민들도 함께 익혀서 때마다 땅설법을 했고요. 다여 스님은 “다른 절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모든 절에서 땅설법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지요. 말하자면 ‘21세기의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되고 다른 사찰과 교류가 없었던 덕분에 안정사에서는 땅설법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019년 시연회 통해 알려져...학계 “고유문화 간직한 불교민속 결정판”
윤광봉 교수는 ‘한국의 불교민속과 연희예술’에서 “현대 사찰에서 옛날식의 땅설법이 이렇게 묵묵히 이어져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며 “이 땅설법은 오래도록 시행해온 불교의 고유문화를 간직한 우리의 불교민속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하지요.
어쨌든 땅설법은 2019년 시연회를 기점으로 오랜 은둔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알려지고 있는 중입니다. 보존을 위한 후원 모임도 생겼고, 서울에서 땅설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됐다고 합니다. 현지 주민들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보존과 육성 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땅설법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가 미처 모르거나 알지 못하는 전통문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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