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의 수행 자리 복원... “스님 같은 도인 많이 나왔으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0.09.03 22:04


암자 앞마당에 서니 굽이치는 산 사이로 저 멀리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묘했다. 걸어서 2~3분 거리인 연암산 중턱의 천장사(天藏寺)에선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아마도 140년 전 경허(鏡虛·1846~1912) 스님은 수행 틈틈이 저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챙겼으리라. 경허 스님이 왜 천장사가 아닌 이곳에 머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최근 복원된 충남 서산 천장사 지장암.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머물렀던 곳이다.

한국 근대 선불교 중흥조로 꼽히는 경허 스님이 깨달은 후 수행한 지장암이 옹산 스님 주도로 최근 복원됐다. 암자 뒷산에선 지붕 너머로 저 멀리 서해 바다가 보인다.

경허 스님은 ‘전설적 인물’이다. 전주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해 한학(漢學)을 공부한 스님은 젊어선 경전에 통달한 명(名)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879년 돌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고 참선 수행 끝에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이곳 천장암(최근에 천장사로 개칭)에 머물며 만공·혜월·수월 등 제자를 가르쳤다. 1886년부터는 범어사⋅해인사⋅천은사⋅화엄사와 오대산·금강산 등 전국의 사찰에 선원(禪院)을 만들어 참선 수행을 지도하며 조선 후기 맥이 끊기다시피 한 선(禪)불교를 중흥했다. 1904년 천장암에서 제자 만공에게 마지막 법문을 한 후 홀연히 북쪽으로 떠나 갑산과 강계 등지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 입적(入寂)했다고 한다. 경허는 모두 18년을 이곳 천장사와 지장암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생애 중 가장 오랜 기간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구름처럼 걸림 없이 살았던 때문인지 한국 불교계에서 경허 스님을 기리는 움직임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충남 서산 천장사 전경. 오른쪽이 천장암, 왼쪽은 염궁선원.

서산 천장사 경허 스님 기념비 /김한수 기

수덕사 주지를 지낸 옹산(翁山·76) 스님은 경허만공선양회장을 맡아 경허의 업적을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섰다. 2012년 경허 스님의 입적 100주기 때 천장사에 기념비를 세우고 ‘염궁(念弓)선원’을 열었다. 경허의 삶과 수행을 정리한 ‘작은 방에서 도인나다’란 책도 펴냈다. 제목의 ‘작은 방‘은 지금도 천장사에 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1평 남짓한 방이다. 이곳에서 한국 근대 선불교가 다시 싹텄다는 뜻이다. 경허 스님의 삶을 장편 ‘길 없는 길’로 풀어낸 소설가 최인호를 기념하는 비도 세웠다. 옹산 스님은 “2011년 천장사 회주(會主)를 맡아 왔을 때 암자는 건물 전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며 “한국 근대 불교를 다시 세운 경허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무르신 공간을 이렇게 놔둘 순 없다는 생각으로 한 발짝씩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충남 서산 천장사 입구의 최인호 기념비. 소설가 최인호씨는 장편 '길 없는 길'을 통해 경허 스님의 일생을 그렸다.

이번 지장암 복원도 선양 사업의 하나다. 천장사 뒷산에 집터만 남았던 지장암을 충남도와 서산시 등의 지원을 받아 18평짜리 건물로 복원했다. 옹산 스님은 상량식 때 ‘칼을 갈아 턱에 받치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무섭게 정진하신 경허 선사의 정진을 본받아 지장암을 복원한다’고 대들보에 적었다. 옹산 스님은 “경허 스님이 깨달은 후 수행하던 암자를 통해 스님의 삶과 사상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이 시대에도 경허 스님 같은 도인(道人)이 나왔으면...”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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