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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초골 공소회장 주교님'의 고별 인사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1.06.29 00:00

 

 

 

최덕기 주교가 100년 전 신자들이 지은 한옥 피정의 집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 주교의 피정 지도는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처럼 구수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2년째 이어지며 최 주교는 고초골을 떠났다. /김한수 기자

“안녕하세요? 최 바오로 주교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밝고 건강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천주교 수원교구장을 지낸 최덕기(73) 주교님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최 주교님께 전화를 드린 이유는 한 달 전쯤 그가 ‘고초골 피정의 집’을 떠났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최 주교님은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셨는데, 그 목소리에서 서운함과 안타까움을 느낀 것은 저의 기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5월 28일 최 주교님은 ‘고초골 피정의 집’ 다음카페에 ‘아듀 고초골’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이미 고초골을 떠나 교구 은퇴 사제들이 공동 생활하는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최 주교님이 고초골을 떠났다는 소식이 안타까운 것은 ‘교구장 은퇴 이후의 삶’의 한 모델이 코로나 때문에 끝나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8년부터 지난해초까지 최 주교님은 고초골 피정의 집에서 직접 일반 교인들의 피정을 지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피정이 1년 넘게 중단되자 결국 고초골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1975년 사제가 된 최 주교님은 독일 뮌스터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수원교구장을 지내던 중 암(림프종) 진단을 받고 조기 은퇴한 분입니다. 최 주교님은 지난 2004년 이태석 신부를 찾아 남수단을 방문하기도 했었지요. 당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이태석 신부의 사연이 소개된 것을 보고 남수단까지 날아가 위로·격려했던 것입니다. 당시 최 주교님의 남수단 방문은 이후 수원교구가 남수단 선교지를 돌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최덕기 주교가 수원교구장이던 2004년 남수단 톤즈로 이태석 신부를 찾아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최 주교의 방문 이후 수원교구는 남수단 선교지를 돌보고 있다. /천주교 수원교구 제공

의욕적으로 수원교구를 챙기던 최 주교님은 뜻밖의 발병으로 교구장직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보통 교구장 주교가 75세에 은퇴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만 61세 은퇴는 너무나 이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최 주교님은 ‘교구장 은퇴 후 사제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신앙 공동체를 찾아 교인들을 돌본 것이지요. 은퇴 후 그가 향한 곳은 경기 여주의 산북 공소(公所)였습니다. 공소란 신자 수가 적어 정식으로 사제가 부임하지 않는 소규모 신앙 공동체입니다. 당시 신자는 153명이었다고 합니다. 최 주교님은 신앙 생활을 쉬고 있는 ‘냉담자’들을 찾아다니며 미사에 나오도록 권유하며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궜습니다. 그 결과 2016년 그가 산북을 떠날 때에는 신자수가 500명이 넘어 정식 본당(성당)으로 승격됐지요. 주변에 신도시가 생긴 것도 아닌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주교님’이 직접 전도에 나서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산북성당을 승격시킨 후 최 주교님이 향한 곳이 바로 고초골이었습니다. 경기 용인 처인구에 있는 고초골 역시 공소입니다. 고초골은 19세기 전반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 살던 곳입니다. 남쪽으로 산을 넘으면 성 김대건 신부가 묻힌 안성 미리내성지이기도 하지요. 1891년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한옥 건물은 수원교구 내에 가장 오래된 한옥 공소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 앞에 낡은 철제 종탑이 놓여있는 풍경은 문자 그대로 평화롭습니다.

최 주교님은 이곳에서 2018년 6월부터 2020년 1월까지 매월 둘째 월요일에 ‘피정 지도’를 했습니다. 저는 2018년 12월에 고초골 공소를 가보았습니다. 옛 한옥이 대부분 그렇듯 20~30명쯤 의자 놓고 앉으면 꽉 차는 구조이지요. 신부님들이 제의(祭衣)를 갈아입는 ‘제의실’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방 뒤편에서 제의를 갈아입고 강의를 하셨습니다. 비록 시설은 협소했지만 강의는 뜨거웠습니다. 우선 최 주교님은 강의 준비를 꼼꼼히 하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헤아려보니 A4 용지로 10장 넘게 강의 내용을 준비하셨더군요. 그렇지만 말씀은 쉽게 하셨지요. 마치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이 말입니다.

피정(避靜)이란 천주교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묵상과 기도를 하는 신앙 수련의 한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신부님들이 지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초골에서는 은퇴하신 주교님이 피정지도를 하니 신자들의 참여가 늘어 제가 방문했던 2018년 12월엔 50명 넘는 인원이 한옥을 채웠습니다. 피정은 최 주교님의 강의와 미사, 점심식사와 산책, 기도 등으로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참가비는 6000원이었습니다. 밖에서 사먹으면 점심 한 끼 값도 안 되는 참가비로 주교님이 지도하는 피정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피정의 전과정은 소박하고 가족적이란 느낌이었습니다. 병환 때문에 조기 은퇴했다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 주교님도 기쁨에 찬 표정이었습니다.

당시 최 주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투병할 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름다운 산천이 다 회색으로 보인 적도 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사제는 죽을 때까지 사제로서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사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닿는 데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산북에서 고초골로 옮길 때까지만 해도 피정 지도까지 직접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제의 삶’을 다시 생각하면서 직접 피정 지도까지 맡게 됐다는 뜻이었습니다.

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고초골 피정의 집을 떠나며 올린 '아듀 고초골' 글의 앞부분. /고초골 피정의 집

고초골에 머무는 동안 최 주교님은 때때로 다음카페에 ‘고초골 공소회장 최주교’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부활절, 성탄절 등 절기를 맞아 교인들에게 띄운 인사도 있고, ‘귀담아 듣고 눈여겨 보자’는 내용의 ‘어른의 덕목 두 가지’ 같은 단상을 적은 글도 있습니다. 작년 3월 코로나가 막 팬데믹으로 접어들 무렵엔 ‘집콕 시기 어떻게 지내십니까’란 글도 올렸습니다. 이 글에서 최 주교는 묘목을 옮겨 심고, 과수나무에 거름 주는 등 공소 주변을 가꾸면서 코로나 시국을 보내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이 무렵부터 이미 오프라인에서 직접 신자들과 대면하는 피정은 할 수 없게 됐지요. 그런 세월이 1년을 넘기게 됐습니다.

“제가 고초골피정의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코로나로 지난해 2월부터 지금까지 피정이 사라졌습니다. 코로나로 비대면 시대에 피정의 집이 할 수 있는 것은, 동영상 피정이나 줌을 활용하는 피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나이가 많아 그런 기기들을 배워서 피정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고초골에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걸림돌이 되기에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최 주교님이 직접 ‘아듀 고초골’이란 글에 적은 ‘고초골을 떠난 이유’입니다. 코로나 이후 종교계에서도 유튜브 동영상이나 줌을 많이 활용합니다. 최 주교님은 그러나 본인의 역할은 ‘대면 피정 지도’까지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또 이 글에서 또 “저도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깁니다. 그로 인하여 피정의 집에 폐가 되지 않아야 하겠기에 고초골을 떠나기로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 대목은 ‘소록도의 천사’로 불렸던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할머니가 소록도를 떠나며 남긴 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모든 고통을 다 안아주었던 두 할머니는 소록도를 떠나며 “고령의 나이가 주변에 짐이 된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최 주교님은 전화 통화에서 “앞으로는 동영상이나 줌을 활용한 새 방법으로 피정하는 것이 새 기준이 될 수도 있다”며 “그렇지만 저로서는 그런 것을 배워서 하기 어렵기 때문에 빨리 떠나야 겠다. 아니면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으로 떠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섭섭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엔 “허허허”라고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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