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새들의 두레박질
김 주 석*
월간 에세이 2005년 5월호(창간 18주년 기념호) 게재
요즘이 산새들의 먹이가 대체로 넉넉하지 못할 때다. 이때가 산새를 들창 가로 불러들일 절호의 기회다. 왜냐하면 솔방울 속의 솔씨나 나무껍질 속의 번데기류 나아가 땅에 떨어진 풀씨들 까지도 어지간히 돌아다니며 찾아먹은 형편인데다 애벌레도 흔하지 않으니까 어디 가서 한 끼를 넉넉하게 때운다는 말인가. 산새들의 식사 시간은 해돋이 직후와 해지기 전이 가장 왕성하지만 낮에도 위협만 가하지 않으면 수시로 찾아든다.
이럴 때 들창 밖에다 모이통을 달아놓고 들깨나 해바라기 씨, 땅콩이나 누에번데기 및 쇠기름 덩이 따위를 놓아두면 산새들이 조석 문안을 사뢴다. 왔던 김에 화려한 노래 소리까지 선물하고 가니 보는 이의 눈과 귀가 함께 즐거울 수밖에. 모이통의 재료는 대나무나 송판 따위로 만드는 것이, 화려한 것보다는 낫다. 사람 눈에 예쁜 것이 아니라 산새가 편하게 느끼는 색깔과 구조로 말씀이다.
들창 가에 흔히 모이는 새로는 박새, 진박새, 쇠박새 등의 박새 무리와 곤줄박이나 동고비, 딱새 등이 있고, 가끔 참새나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 또는 검은머리오목눈이)도 열댓 마리 이상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곤 한다. 박새 무리는 대부분 한 쌍씩 차례로 날아들어 화답하는 소리로 지저귀곤 한다. 먹이의 양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줄수록 좋고, 먹이 조각의 크기도 작을수록 오래 머무른다는 것을 감안할 일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거나 통땅콩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통땅콩일 때는 덥석 물고 멀리 훌쩍 날아 가버리기 십상이니 서로 정을 주고받을 시간이 그만큼 각박해진다.
다람쥐들이나 보라매가 그러하듯이, 박새 무리도 두 발로 땅콩을 잡고 쪼아 먹는데 그 모습이 여간 앙증스럽지가 않다. 들깨를 까먹을 때도 꼭 두 발로 들깨 알을 잡고서 껍질을 벗겨 먹으며 먹이를 먹는 동안에도 천적을 의식해서 쉼 없이 한편 먹으며 잠깐 고개를 들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데, 창문 안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겐 관대한 편이어서 가까이에서의 관찰을 허용한다. 저 윤기 나는 깃털, 저 맑은 눈망울. 저 팔팔한 날갯짓, 어느 것 하나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기억력이 비상한 산새들이 먹이통의 위치를 기억할라치면 매일 아침저녁 어김없이 찾아든다. 누가 감히 ‘새대가리’라는 말로 새들의 지능에 대해 야멸친 언사를 날렸단 말인가? 박새뿐 아니라 까치와 어치들의 기억력이 더 비상하다. 가을에 자기가 숨겨놓은 도토리를 눈이 몇 십 센티씩 쌓인 서리아침에 정확히 찾아 먹는 것을 보았는가?
산새가 마음 놓고 들락거리기 며칠 지나 정이 들면 창문을 열어놓고도 그들의 재롱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손바닥 위에 놓아둔 먹이를 스스럼없이 날아와서 먹으라고 청해도 된다. 저기 어느 산사의 스님은 아침마다 새들과 이렇듯 인사를 주고받는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조그만 솔방울을 삼합사 실로 매달아 그 속에 잣을 몇 개 박아놓을라치면 박새 무리가 부리와 발가락을 교묘하게 번갈아 움직여서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듯한 묘기와 재롱까지 보여줄 날도 멀지 않은 성싶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자기 특유의 휘파람 소리를 통해 수시로 산새들을 불러 모으고 교감할 수도 있을 터인즉.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저들을 잡아보겠다는 기심(欺心)이 내재하면 귀신같이도 알고 날아들지 않는다니 사람은 자연에 대해 겸허할 일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 너무 내편에까지 끌어들이려 하지 말고 조금만 가까이서 교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동시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겠는가. 오늘도 나는 마누라와 함께 “재롱이 왔다.”는 신호로 산새들의 출현을 서로에게 제보해서 저들의 재롱을 즐겁게 지켜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 아름다운 자연이여! 정겨운 산새 소리여! 귀여운 날갯짓이여! 빛나는 눈동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