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김성영)

창작 수필 2005. 2. 10. 10:11

수필 “세 월(歲月)”

金 成榮*


아파트로 이사 온 지가 어언 15년이 훨씬 넘었지만 앞 베란다에는 아직 풀지 않는 이삿짐 상자가 남아있다. 쓰레기로 갖다 버리라는 성화 속에서도 나는 아직 정리를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한가한 시간이 있게 되면 상자를 하나씩 응접실에 가져와서 내용물을 정리하는 것도 나에게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색이 바랜 책, 편지 묶음, 축전 등등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장시간 붙들어 매는 것은 약간 누렇게 변해버린 반명함판인 학창시절의 흑백사진들이다. 세월의 한 순간을 한 장의 인화지에 포박해 둔 셈이다.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지난날의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마치 떠내려가는 고무신 한 짝을 뒤좇아 가서 붙잡는 기분이다.

소풍을 가는 날이면 이웃집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를 빌려다가 찍은 것 들이다. 거의 반세기 전의 일들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해진다. 검은색 교복인 윗저고리는 럭비선수처럼 양어깨에는 심을 크게 넣고 바지는 나팔바지를 입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때는 어서 빨리 세월이 흘러서 의젓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전부였으나 자금은 오히려 학창시절 때 좀더 많은 추억들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을 찾아가는 일이 많아졌다. 잊혀진 옛 추억거리를 보고 기억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심산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보아왔던 골동품들이 여기저기 많이 쌓여 있고,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마음껏 눈으로 보고 즐길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가끔 어깨를 부딪치는 인파 속에서 낯익은 이를 만나면 더더욱 반갑다. 젊은 시절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아서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 인생의 뒤안길로 내몰리는 이 시점에서는 제발 세월이 천천히 다가와 주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나에게는 세월이 어느새 내월(來月)이 된 것이 두렵기만 하다. 흔히들 세간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40대는 시속 40Km, 50대는 50Km, 60대는 60Km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세월이 과연 시속 몇 Km로 오고 가는지를 자문 해보기도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정성들여 만든 잣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하철의 안내 방송이 들리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내린다. 또 몇 사람이 타기도 한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세월의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듯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가수의 노래가 귓가에서 맴돌고 있다. 노래하는 가수의 반쯤 감은 눈으로 멀어져 가는 시간의 흐름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속에 묻혀질 일들을 아쉬워하는 듯 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세월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월은 영겁의 길이고 이 순간도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어김없이 다가와서 어김없이 지나가는 세월이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정직한 것이 세월이다. 후회는 먼저 오는 일이 없다는 격언을 생각해 본다. 오늘도 나는 세월이라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안네의 일기” 1944. 1. 7(금). 일기속의 한 구절을 외워본다.

“Time heals all wounds."

(시간은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한다). ?


*글쓴이 김성영 님은 호가 취암으로

‘사투리’와 함께 ‘사군자회’ 회원이며

반도체 공학박사로 학계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음.


711k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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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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