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농법, 항복 놀이
사투리 씀
노고지리 소리
손목 안쪽에 얼음 조각을 올려놓고 누가 더 오래 견디는지를 내기하며, 시리게 파고드는 아픔을 견딜힘 하나로 참아내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내 조카애들은 괴롭고 힘든 건 초장부터 피하려 드는데 이골이 나 있다. 그런 조카 녀석들이 우리 집에 몰려오는 날이면 나는 일부러 ‘항복놀이’란 걸 슬슬 벌이곤 한다.
그건 사실 말이 놀이일 뿐, 상대를 마구 깔고 뭉개거나 짓밟으면서 ‘항복’을 강요하는 격렬한 장난으로, 항복을 하라고 꼬득이면 항복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청개구리 속성을 한껏 살린 것인데 만약 항복을 하는 쪽은 그날 정신적으로 끝장을 맞는다.
항복이 끝장이던 역사는 짧지 않다. 개화기초 신미양요(1871) 때, 강화로 쳐들어왔던 미국 해병대가 전투 중에 조선군한테 잡힌 몇몇 미군 포로를 다수의 조선군 포로와 교환코자 했건만 조선에선 이를 거절하더란다. 왠고 하니 미군측에 항복한 얼뜨기는 너희가 맘대로 처단해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요, 자결할지언정 치욕스레 항복하지 않는 것이 대물림해 온 선비의 떳떳함이었으니까.
우리 집 항복놀이는 머리가 희끗한 아재비가 체면을 팽개치고 개구쟁이들과 가관스레 1 대 다수로 벌이는 치기(稚氣) 만점 짜리 놀이다.
내가 먼저 한 녀석을 잡아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가위눌림으로 옥죄기 시작하면 귀여운 악마들은 잡힌 놈을 빼내려고 아우성을 치거나, 날 공격하려 드는 바람에 집안은 금새 아수라장이 된다. 가위에 눌려 진땀을 쏟는 녀석에게 나는,
“항복만 하면 놓아주겠노라”고 슬슬 구슬린다. 그런데 녀석들은
“항복 안 해요!”로 버틴다.
내가 “해라!”하면, “안 한다요!”로 나오다가 나중에는 “해!” “안 해!”로 말조차도 마구 놓아 버린다.
엎치락뒤치락하며 깔깔대던 소리가 드디어 우는지 웃는지 모를 괴성(怪聲)으로 바뀐다. 옴짝달싹못하고 울먹이는 녀석이 생기면 그를 도울 셈으로 몸을 날린 딴 녀석이 내 목에 올라타고 숨통을 끊으려 든다. 내가 헉헉대는 순간을 틈타 잽싸게 빠져나간 조무래기들은 한통속으로 환성을 지르며 패거리를 지어 나를 약올린다.
이쯤 되면 ‘아잡 조카’는커녕 세대차도 없어진다. 내 팔다리마다 엉킨 개구쟁이들은 거꾸로 내게 “항복해!”라며 강권이다. 나조차도 이젠 숨을 헐떡이며 “항복 안 해!”로 대응해야 하다니, 점입가경이다.
고통이 가중되는 만큼 걔들한테도 알량한 자존심이 싹트는지 눈물을 징징 짜면서도 항복만은 않는다. 만약 ‘항복’ 소리를 했다가는 구제 불능의 낭떠러지로 내동댕이쳐질 테니까 말이다. 그걸 눈물로 참는 모습이 바로 나약한 도시 아이들에게서 강인함이 나타나는 순간이라 장하고도 대견스럽다.
어쨌든 나잇살 깨나 먹은 아재비가 코흘리개들과 엉킨 품이 마누라에겐 몹시 꼴사나운가 보다. 참다못한 마누라가 “어른이 채신.....!” 하는 비난의 화살을 쏠 때쯤엔, 뱃가죽도 아프고 목구멍조차 따갑다. 그제야 휴전을 선언하고 냉수를 벌컥이는데 내겐 그게 바로 꿀맛인 것을......
그런데 휴전은 순간일 뿐 녀석들은 금새 또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다. 저렇게들 좋아하는 걸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내가 안타깝다. 어줍잖은 권위를 세운답시고 용을 써 봐야 별 영검도 없는 주제면서 말이다.
반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라 알밤 한 대만 맞아도, “왜 때리느냐”고 발끈하는 녀석들, 견딜힘이 없어 턱걸이를 열 번도 못하는 놈들이 항복놀이를 통해 ‘동경이’나 ‘진돗개’처럼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강인함을 좀 키운 걸까?
앞날에도 나는 눈 높이를 방바닥에 까는 ‘항복놀이’를 종종 하며, ‘지는 것이 이기는 거고 죽어도 항복하지 말 것’을 느끼도록 해 줄 심산이다. 사우나탕 가서 생땀을 흘리느니 걔들과 뒹굴며 서로 목을 얼싸안으면 세대차도 좁혀지고 피붙이의 끈적한 정도 싹틀 테니까. 체면이 뭐 그리 대수냐? 이게 바로 나약한 걸 강인하게 가꾸는 유기농법이 아니리오! 강인한 새싹은 떡잎부터 가꿔야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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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세이'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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