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雁鴨池>’·‘안압부평<雁鴨浮萍>’…

 신라와 경주 알리는 킬러콘텐츠 제대로 알려야
월지(月池)의 옛 이름‘안압지(雁鴨池)’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
명확하게 뜻 밝혀진‘안압지’라는 이름 안압부평의 고사는‘괴(怪)’로 복원돼야

선애경 기자 / violetta22@naver.com1315호입력 : 2017년 11월 02일(목) 13:22 
 

↑↑ 1950년대 안압지의 모습으로, 사진 속 누각은 일제강점기 때 세운 호림정으로 지금은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
ⓒ (주)경주신문사


동궁과 월지(안압지)는 경주 관광의 가장 중요한 핵심 명소다. 저녁 8시를 넘어 찾은 월지에는 가을 밤 쌀쌀한 날씨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월지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과연 월지는 야경도 아름다웠다. 월지의 낮과 밤은 가히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궁중의 화려한 위상이 새삼 다가왔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월지의 신비함에 동화된 방문객들도 월지 속 풍경이 되고 있었다.

월지를 찾은 젊은 부부에게 ‘안압지’ 라는 이름에 대해 알고 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참 다행한 일이었다. 못 이름이 월지로 개정되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도 ‘안압지’라 부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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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근(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인물사진)소장은 최근에 발표한 논문“‘안압지(雁鴨池)’의 이름과 ‘안압부평(雁鴨浮萍)’의 의미 연구 - 안압지(雁鴨池) 제영시(題詠詩)를 중심으로-”에서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이 명명되고 전승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안압지의 역사문화사적 현상, ‘동도칠괴(東都七怪)’의 하나인 ‘안압부평(雁鴨浮萍)’ 혹은 ‘안지부초(鴈池浮草)’의 의미 탐색을 위해 안압지 제영시(題詠詩)와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 발표한 바 있다. 지난 30일 안압지(월지)에서 그를 만났다.

“월지의 가장 큰 문제는 킬러 콘텐츠가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안압지라는 원래 이름의 의미도 모른채 ‘인증샷’만 찍고 지나가버리고, ‘안압부평’이라는 동도칠괴 중 하나인 괴이함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죠. 안압부평을‘괴(怪)’로써 부각시켜야 방문객들이 안압지를 스토리텔링으로 기억하고 그들이 다른 곳에 가서라도 이 이야기를 전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안압부평의 의미를 현재에 다시 재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힘주어 말한 강 소장은 시종, 인문학의 업적이 관광객과 시정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본 기사는 주로 강 소장의 논문과 자문을 통해 구성했다.

↑↑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오는 까닭으로 ‘안압지’로 이름을 지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전해지는 월지의 낮과 밤의 모습이다. 옛 신라 궁중의 화려한 위상이 새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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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1530년부터 2011년까지 ‘481년’ 동안 우리에게 정겨운 이름으로 불렸고 기억돼
안압지에 대한 심도있는 문화원형적 연구를 구체적으로 수행한 강 소장의 논문에서는 ‘‘안압지’의 현재 월지로 불린다. 월지는 동궁 안의 연못이며 동궁은 월지궁(月池宮)으로 불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안압지’라는 이름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압지는 1530년(중종 25)부터 최근 월지(月池)로 이름으로 바뀐 2011년까지 481년 동안 우리에게 정겨운 이름으로 불렸고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압지라는 이름의 의미조차 분명하게 해명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월지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도 분분한 만큼, 안압지란 이름의 의미를 해명한 것을 계기로 ‘이 못’의 정확한 이름으로 ‘안압지’가 적합한지‘월지’가 적당한지에 대해 학계의 심도한 논의가 계속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안압지는 ‘안하지’, ‘압지’, ‘안지’, ‘동호’로도 불려
‘안압지는 신라의 유명한 유적이다. 신라 문무왕 14년(647)에 처음 축조됐으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고, 조선초 김시습은 1471년(성종 2) 이 못을 안하지(安夏池)라 불렀다. 안압지의 최초 이름이었던 것이다.

경주 체재기에 김시습이 지은 ‘안하지구지(安夏池舊址)’는 안압지를 제목으로 노래한 첫 시작품이다. 그 후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와서 이 못은 처음으로 안압지(雁鴨池)로 불렸고 줄여서는 안지(雁池), 혹은 압지(鴨池)이다. 그리고 이 기록을 그대로 전재한 경주 최고의 읍지인 『동경잡기』(헌종 10년, 1669)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아래와 같다.

‘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무산(巫山)의 십이 봉을 본뜨고 화훼를 뿌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유지가 있는데 아직도 초석이 밭이랑 사이에 있다’

↑↑ <좌> 동궁과 월지 발굴현장에서 신라시대 변기 시설과 배수시설이 연결된 채 발굴됐다. <우> 월지 유물 중 통일신라 전기의 대표적인 불상인 금동삼존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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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의 ‘동호서사기(東湖書舍記)’는 안압지라는 이름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자료
문화재청이 1963년 ‘안압지와 임해전지(臨海殿址)’를 ‘사적 제18호’로 지정하면서 ‘안압지’란 이름은 공식화된다. 그러나 2011년 ‘경주 동궁(慶州 東宮)과 월지(月池)’로 개명해 안압지란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안압지가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노니는 못이라 하여 이름이 명명되었다”고 추정했지만 문헌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었다. 이에 강석근 소장은 경주 문인 김철우(1566~1654)의 ‘안압지’라는 시에서 “들오리와 물새는 스스로 못을 오르내리네”라는 구절과 조선후기 경주의 유학자 구암 이수인(1739~1822)의 「동호서사기」에서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오는 까닭으로 ‘안압지’로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을 찾아 왜 안압지로 불렸는지 그 문헌 증거를 제시했다.

‘이수인의 동호서사기에는 보다 구체적 내용이 실려 있다. ‘일찍부터 부평초의 특이함이 드러났다. 역시 기러기들과 오리들이 날아오르고 모이는 까닭으로 안압지라 이름을 지었다’ 이 기록은 조선 후기의 자료이지만, 안압지가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오르고 모이는 까닭으로 이름을 안압지라 지었다는 분명한 내용을 싣고 있다.

이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처럼 조선 중기의 자료는 아니지만, 경주 사람들 사이에서 이 못이 왜 안압지로 불렸는지를 알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다’고 밝혔다.

특히 동호서사기는 안압지가 ‘동호’라는 사실과 안압지에는 특별한 부평초가 있으며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오르고 모이는 까닭으로 이 못을 안압지로 불렀다는 유일하고 확실한 기록이라고 했다. 이로써,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모여서 안압지로 명명했다는 그간의 추정이 옳았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 <왼쪽부터> 와전류 중 보상화 무늬전. 안압지 유물의 대부분은 와전류다. 사진은 귀면와. 월지에서 발굴된 신라주령구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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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칠괴(東都七怪)’ 중 ‘안압부평(雁鴨浮萍)’은 안압지를 떠도는 부평초로 매우 괴이
임진왜란 전후에 경주지역에서 생성된 신라 관련 설화 중에는 ‘동도칠괴(東都七怪)’가 있다. ‘경주의 일곱 가지 괴이한 이야기’로 불리는 이 설화는 각 편에 따라 ‘칠괴’, ‘팔괴’로 불린다. 이 칠괴 가운데 하나가 ‘안압부평(雁鴨浮萍)’이다. 강 소장의 논문에서는 ‘이 칠괴에 대한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성록』 「정조 4년(1780)」조다. 일성록의 안압부평은 안압지의 부평이 괴이하다는 매우 귀중한 정보를 전해준다. ‘안압부평’이 ‘동도칠괴’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일성록의 기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강 소장은 안압지를 떠도는 부평초란 뜻인 안압부평은 “안압지에 넓이가 반석(盤石)과 같은 떠다니는 흙덩이가 있고 그 위에 덩굴풀이 나 있으며, 이것이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기록을 발굴해낸다. 이 문건은 안압지의 부평초가 동도칠괴의 하나이며 괴이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강 소장은 “이로써 부평초 즉 ‘안지부초(鴈池浮草)’가 왜 동도칠괴에 포함되고, 수많은 문인들의 시문에 왜 ‘안압부평’이 자주 회자되고 언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정조 4년(1780)에 채록된 것으로 ‘안압부평’을 해명한 가장 오래된 자료인 까닭에 그 의미가 더욱 크고, 이후의 기록에서는 ‘안압부평’의 괴이한 요소는 점차 사라져갔습니다”라고 했다.

‘이후 후대로 갈수록 안압부평은 ‘동도칠괴’에서 괴이한 요소는 탈색되어지고 승경과 명승의 개념이 강조된다. 1802년 편집된 성대중의 『청성잡기』의 ‘안압부평’은 “안압지의 부평초는 연못의 수위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항상 가라앉지 않는다”는 의미로써 하나의 풍광으로 이해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윤경렬 · 권오찬은 ‘경주팔괴’의 하나인 안압부평을 괴이함과 신성함이 사라진 모습을 현실적으로 해석했다고 했다. 이는 괴이하게 여겨지던 동도칠괴의 안압부평이 이미 풍경화, 승경화된 것을 잘 보여주었다’

-기록속 중요 키워드인‘안압부평’이 지닌 괴(怪)의 의미와 명확하게 그 뜻 밝혀진‘안압지’라는 이름
강 소장은 “제가 처음 학계에 보고한 ‘안압부평’을 포함한 ‘동도칠괴’는 신라와 경주를 알리는 대표적인 킬러콘텐츠들입니다. 특히 안압부평의 고사는‘괴(怪)’로 복원돼야 합니다. 안압지의 관광과 홍보 자원으로 이것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압지를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인공적인 안압부평도 조성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적극적인 스토리텔링 작업도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하면서 이 논문이 실용화를 위한 문화원형적,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는 또,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안압지라는 이름의 의미도 밝히지 않은채 안압지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름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 차제에, 원형 연구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문화 유적 이름이라도 정확히 설명하고 현대인들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충분한 스토리텔링은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안길 수 있는 것이지요”라고 강조했다.

“기록속에 있는 이야기 중 중요 키워드는 바로 ‘안압부평’이 지닌 괴(怪)의 의미와 안압지라는 이름입니다. 이 논의가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과 경주시민들에게 안압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물론, 자긍심을 높이고 경주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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