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이두 역사를 200년 앞당기는 자료 확인’이라며 지난 13일 경주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지금까지 국어학계는 ‘〈감산사 아미타불 조성기〉(720년),〈화엄경 사경조성기〉(755년 전후)를 살폈을 때, 신라 이두의 완성 시기는 8세기’라고 봤다. 그런데, 신출토 월성해자를 적외선 촬영해 목간의 글자를 판독한 결과, 한자의 ‘신라식 표기 방법’은 6세기의 신라말(言)임을 확인했다. 신라 이두 역사가 200년 앞당겨진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한국목간학회와 함께 12일부터 이틀간 경주에서 마련한 ‘동아시아 고대 도성의 축조의례와 월성해자 목간’ 국제학술대회가 한국 국어사에 큰 성과를 냈다.
|
|
|
↑↑ 백견(白遣)이 있는 목간 |
ⓒ 서라벌신문 |
|
|
|
|
↑↑ 백견(白遣) 확대 |
ⓒ 서라벌신문 |
|
주인공은 목간의 글자 ‘爲在之’, ‘敎在之’(위재지/교재지), ‘白遣’(백견),
위재지를 신라 식으로 읽으면 ‘ (하)겨다’로 현대국어로 ‘하였다’가 된다. 이는 신라인들은 8세기가 아니라 이미 6세기부터 한자를 이용해 ‘동사의 활용’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신라어 표기법을 발달시켰음을 말해준다. 또 ‘白遣’(백견)도 발견됐다. ‘白遣’(백견)의 ‘백’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경칭(敬稱) 동사로 ‘사뢰-’로 훈독(訓讀)하는데,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 소위 ‘주공지목간’에 ‘백견’이 등장했다. 백두현 교수(경북대)는 “이 백견은 향가의 ‘원왕생가’와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탑중수기〉(1024)와〈서석탑중수형지기〉(1038)에 가서야 나온다. 2차 자료인 삼국유사 향가에 ‘遣’(견)이 자주 쓰이지만 이들보다 훨씬 앞서는 1차 자료인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에 ‘白遣’(백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두 발달사에 커다란 충격”이라고 했다. ‘*’ : 목간에서 ‘丙午’(병오)가 나왔기 때문에 연대를 법흥왕 13년(526년)에서 진평왕 8년(586년) 을 하한선으로 봄. 한편, 월성해자 목간에는 문서 작성자를 이르는 ‘문인’이라는 말이 우리나라 기록에 처음 등장해 관심을 끌었으며, 관직명으로 보이는 ‘전중대등’(典中大等), 안두(安豆)라는 녹두 이름까지 나와 연구자들을 흥분케 했다.
‘서동요’ 완벽한 신라어 표기, 설총의 ‘이방언독구경 훈도후생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그러나 학계는 지금껏 의구심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 에서 수수께끼 풀리다
김영욱 교수(서울시립대)는 “위재지와 백견 등의 용례들을 보면, 6세기 당시에 이미 한자의 신라화가 완성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향가 14수는 한국문학의 정수이자 신라문화의 상징이다. 서동요는 진평왕 시절에 지어진 것이고, 여기에 한자를 변형시킨 완벽한 신라어 표기가 나온다. 하지만 신라어 표기가 있는 여러 자료들은 8세기 때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학계에서는 ‘6세기 서동요가 과연 그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반영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김부식이 고려시대에 쓴『삼국사기』에는 설총이 ‘우리말(方言)로 아홉 개의 경전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讀九經 訓導後生)’는 기록이 나온다. 설총은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터고, 이를 뒷받침할 1차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학계는 ‘고려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해 늘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즉 ‘한문경전을 그 당시 어떻게 신라어로 읽어내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숙제를 학자들이 갖고 있었다. ▶9면에서 계속
‘文人’ (문인), 우리나라 기록에 첫 등장 그러나 이번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 해독을 통해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6세기 한자의 신라화가 완성되고, 신라어를 신라식 표기방식으로 문학작품 서동요를 기록해 낼 정도의 수준이었음이 확인됐다. 또 이를 바탕으로 7세기 후반쯤에는 외국어 경전까지도 신라어로 읽어내고 표기할 수 있었으며, 체계적인 경전학습이 가능해졌고 경전 풀이집들도 널리 퍼질 수 있었다고 학자들은 봤다. 그동안 국어학계가 갖고 있던 신라 향가와 기록된 설총의 이야기에 대한 의구심이 풀렸다는 얘기다. 참가 토론자들은 ‘신라의 언어문화와 사회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고 의견 일치를 봤다.
신라어 일본에 수출, 9세기 한자의 일본화에 기여 김영욱 교수는 총평에서 “황복사 문자유물의 기록에 심상 스님의 이름이 있다. 누군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그가 화엄경을 전파시켜 8세기 일본 동대사 인근에서 화엄경 강의가 이뤄졌다. 7세기 일본 목간자료를 통해 일본도 ‘한자의 일본화’를 추정됐고, 화엄경을 일본어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훈점과 초기 가타가나가 나타났다고 한다. 풀이하면 화엄경을 일본인이 알도록 신라어로 표기해 가르쳤다는 뜻이고, 그 표기 방식이 일본의 ‘가타가나 형성’에 반영됐다는 사실이다. 신라어가 일본에 수출돼 일본어 기원에 기여했다는 것인데, 6세기 연대의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이 이 수출설(?)을 뒷받침해 주는 격이 됐다”고 했다. 또한 김 교수는 “월성 목간자료의 발견과 해독으로 6세기 신라의 문자 수준과 문화수준을 가늠케 돼 신출토 월성목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했다.
|
|
|
↑↑ 문인(文人)이 있는 목간 |
ⓒ 서라벌신문 |
|
|
|
|
↑↑ 문인(文人) 확대 |
ⓒ 서라벌신문 |
| 월성해자 발굴은 계속된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는 주보돈 교수(경북대)의 기조강연 ‘월성과 해자 출토목간의 의미’를시작으로 박정재 연구원(경주문화재연구소)의 ‘경주 월성해자 조사 성과와 목간’, 윤선태 교수(동국대)의 ‘월성해자목간의 연구성과와 신출토목간의 판독’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도성 축조의례와 출토 자료를 소개했다. 또 백두현 교수(경북대)의 ‘월성해자목간의 이두 자료’를 비롯해, 목간의 서체까지 살피는 정현숙 교수(원광대)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목간을 두고 다양한 발표와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행사를 마련한 이종훈 소장(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은 “목간학회 도움으로 월성해자 발굴 의의가 더 커졌다”는 감사의 말과 “월성해자는 계속 발굴된다.”며 향후 발굴에 따른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는 여러 출토유물과 함께 월성해자 목간이 월성의 축조 시기와 방법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편 목간의 내용을 판독해낸 한국목간학회는 고고학적 유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해내기 위해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10년 전에 출범했다. 그간 문자를 중심으로 발표한 연구결과물들은 인접 학문에 충격을 주고 발전에 기여했다. 이성시 학회장(한국목간학회)은 “학회 결성 10년을 맞아 월성해자에서 나온 묵서(墨書) 목간 7점을 해독한 것처럼 치열한 연구와 토론으로 학회 결성의 의의를 더 높이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