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리 좀?
부모님에겐 천금 같은 논밭과 소를 등록금 낼 고비 때마다 팔아서 공부랍시고 마쳤건만 대학 졸업자는 넘치고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라 취업을 못해 안달하던 4·19 세대가, 운 좋게 한국화약의 공채 1기생으로 뽑혔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재정보증인을 구하지 못한 때문에 여기저기를 헤매는 통에, 닷새나 늦게야 인천 공장에 부임신고를 하고 보니 입사동기들의 오리엔테이션은 벌써 끝나버린 뒤였다. 오리엔테이션도 없이 학생 기분에 젖은 채 산업현장으로 직행했더니 담당 황덕상 직속계장의 과제가 며칠째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건 무려 12쪽에 달하는 산화티타늄 즉 ‘티타늄 디옥사이드(Titanium dioxide)’라는 깨알 같은 영어 원문이었는데, 힐끗 훑어보니 제목부터 생소한데다가 문장도 교과서와 달리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근엄한 황 계장께서는,
“김 군, 부임이 늦었구먼 그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해 지기 전에 이것을 12번 읽도록 하시게.”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내 재주에 무슨 수로 이것을 12번씩이나 읽겠는가? 낯선 단어를 찾는 데만도 반나절이 넘게 걸릴 텐데 12번씩 읽으라니? 명령치고는 실행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새까만 신입사원한테 이렇듯 무리한 명령을 해도 되남? 유행가 말마따나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어?’ 싶은 생각이 들자 나는 교수님을 상대로 응석 부리듯,
“흠흠, 계장님! 7번까지는 읽어보겠습니다만 12번은 도저히…….”
장난기 섞어 썰렁한 얘기를 날리자, 순간 그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나를 잡아먹을 듯 도끼눈으로 변했다. ‘주는 대로 먹고 나오는 대로 지껄인’ 철딱서니 없는 수습사원의 한마디가 그토록 노여웠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