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냥 짜리 인생(1)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일들이 세상사는 이야기다. 오래 전에 방영된 ‘제빵왕 김 탁구TV 드라마도 서민들의 평범한 생활의 애환 얘기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했을 성싶다.

60년대는 나이롱의 시대였다. 처음 나온 나이롱 양말은 헤어져서 못 신는다는 법이 없었다. 바가지도 나이롱 바가지로, 장판도 나이롱 장판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화투까지도 나이롱뻥이란 게 생겨났고, 꾀병을 앓는 환자도 나이롱 환자라 불렀다. 좀 색다른 것에는 으레 나이롱이란 접두사가 붙었다. 이 나이롱이 차츰 나쁜 뜻으로 변질돼 갈 때, 나이롱스럽지 않은 사내가 등장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물론, 얘기의 줄거리도 기억에 어슴푸레하지만 열두 냥 짜리 인생이라는 라디오 연속극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 사내는 험한 토목공사판에 뛰어들어,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과 심한 입씨름으로 맞서기도 했으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어려움도 밀고 나갔다. 때로는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는, 끈질기고 일복 많은 사내였다.

 

열두냥 짜리 인생 노래

https://youtu.be/Ter9hbBA5OQ

 

어쩐지 나는 그 사내가 좋았다. 평범하고 소탈하고 뚝심 있는 사내의 내음을 풍겨서 그가 좋았는지, 아니면,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하던 민요풍의 흥겨운 주제가 가락에 더 매혹되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 열두 냥 짜리 인생이란 라디오 방송극의 인기는 분명히 텔레비전 연속극을 훨씬 능가했다고 믿어진다.

 

한화(그 당시에는 한국화약)는 그때, 앞으로 국가 사회에 기여함은 물론, 수익성 있는 성장 사업을 찾고 있었다. 화학공업과, 기계공업까지 무척 많은 사업에 대해 시장 조사를 했다. 업무 지시는 가을날 알밤처럼 떨어졌다.

시멘트 수급 현황과 전망을 월말까지 조사 보고할 사.”

합판의 수출 전망과 경제성을 내주 중으로 보고 요망.”

이렇듯 시간은 딱 지정 돼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통계자료를 입수해야 되나, ‘수급통계 실적이 없다는 것이 상투적인 대답이었다. 상공부, 경제기획원, 산업은행 등 자료가 있을만한 곳은 비지땀을 흘리며 돌아다녔으며, 관련 협회는 물론, 한국은행, 무역협회까지 뒤져도 대답은 한결 같았다. 기초자료가 있어야 다음 업무를 진행할 수 있으련만, 난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 안면이 있는 얼굴만 보이면, “형님하며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지정된 시각은 각일각으로 닥쳐왔다. 억지를 부리다시피 해 얻어온 자료들을 펼쳐놓고 보면 자료마다 숫자가 달랐다. 경제 기반이 잡히지 않았던 나일론 시대에 제대로 된 통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통계란 것 역시 나일론 통계였다. 입수된 모든 자료의 숫자를 그레프지에 옮겨 점을 찍어, 실적치에 대한 대강의 흐름을 굵은 선으로 그리곤, 뱀자를 대고 적절한 포물선을 계속 그어 나가는 유치한 방법으로 수요 추정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삼 년 각시 하루 바쁘다더니 정해진 전날 밤에야 보고서의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 소리 없이 여름밤은 깊어가고, 텅 빈 서울 시청 앞 전찻길 건너, 달빛이 하얗게 깔린 덕수궁에는 적막을 깨는 쓰르라미 소리만 가득했다.

 

휴우, 보고서 작성이 드디어 끝났다.

어느 시인이 달빛을 싸늘하다 했던가? 나는 열기에 지쳐 하릴없이 시인을 원망했다.

 

이튿날 보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목요일 오후까지 과산화수소의 수급전망과 각 제조 방법의 장단점을 비교 보고할 사.”가 떨어졌다.

닫는 말에 채찍질한다던가? 눈코 뜰 사이도 없이 업무 지시를 받고 뛰어야만 했다.

과산화수소의 추정 제조 원가 및 추정 손익 계산서를 작성할 사.”

우리 나라 농약 산업의 현황과 전망은?”

일본의 알루미늄 은박지 산업의 현황과 우리 나라에서의 사업성을 2주일 내로 보고할 것.”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자문해 보며, 업무계획이라고 구상하고 앉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봐,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떡해? ? 빨리 빨리 뛰어, 2주일 뿐이야! 조속히 끝내도록!”

정신을 차려야 염불도 하고, 개구리도 옴츠려야 멀리 뛰는 법인데......’

나는 속으로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이내 뛰자!’ 하고는 국립도서관, 한국은행 등을 진펄에 개구리 뛰듯이 뛰었다. 헌책방은 물론 일본 책까지도 뒤지다 보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요행히 몇 가지 참고자료를 얻는 때도 있었다.

보고서는, 그 제품의 용도, 성질, 제조 공정, 수급추정, 투자액, 추정 손익 등 항목별로 작성해야 하고, 요약표에는 종합 의견: 사업성이 비교적 유망함이라 썼다. 내 생각에는 이만하면 꾀 쓸만한 보고서라 믿고, 지정 시간 전에 제출하고서, 내심으로,

아주 잘 됐군, 시간 내로 작성하느라고...’ 정도로는 말해 주기를 바랐으나, “애썼네.”는커녕,

이게 무슨 자야? 이 글자가 틀렸구먼, ? 대학을 나왔다는 주제에 이것 하나도 몰라?”

하며 글자 한 자 틀린 것 때문에 된 호통을 맞을 땐, 솔직히 목구멍으로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보고서 전체를 놓고 체계나 내용의 미비점 등이라도 지적해줬으면 좋으련만, 글자 한 자를 집어 여럿 앞에서 나무라다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돌장승처럼 서 있을 수밖에..... 그런 일이 있은 뒤, 우리 실무진들 사이에는 핀잔하는 뜻을 담아 대학을 나왔다는 주제에 그것도 하나 몰라?’하는 은어가 생겼다.

 

 이 글은 한화그룹의

'다이나마이트' 지 백일장에서 은상을 받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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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투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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